[인민화보] 우웨이산, 시대를 조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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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4-1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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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인망> [사진=인민화보 완취안(萬全) 기자]


인민화보 저우진(周瑾) 기자 =지난 20여 년 동안 우웨이산의 중국 유명인물 시리즈 조소 작품이 세계 각지에서 선보이며 중국 문화의 운치와 품격을 보여주었다. 그는 역사 발전의 모든 좌표점에 대표적인 인물이 있고 그들의 이미지에 민족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는 청동으로 유명 인물들의 이미지를 만들고 정신을 모으고 그 공적을 빚어내 후대를 격려하고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시대에 영원한 가치를 세웠다.

우연히 시작된 조소 인생

1962년 우웨이산은 장쑤성 리샤허(里下河) 지역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교사였고 큰 아버지는 유명한 학자이자 시인, 서예가인 가오얼스(高二適)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의 ‘사부’는 집에 있던 수많은 고대 명화첩이었다. 11살 때 우웨이산은 자신의 그림을 모색했다. 당시 그에게 그림은 그저 취미였다. 19살 때 대학입시에 두 번 낙방한 우웨이산은 인연이 닿아 우시(無錫)공예미술기공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환경을 접한 그는 주위의 모든 것이 신선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단순한 스킬과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창장(長江), 청산(青山), 원림(園林), 수향(水鄉), 고등(古藤), 정원(庭院), 석교(石橋), 봉선(蓬船), 옛 찻집을 그렸다.

그곳에서 우웨이산은 뛰어난 민간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점토인형의 대가 가오뱌오(高標), ‘수날희문(手捏戲文)’의 명사 위샹롄(喻香蓮), 공예미술의 대가 류자쿠이(柳家奎), 왕무둥(王木東) 등을 만났다. 사부들은 그에게 민간 예술과 그것에 담긴 지혜를 전수해주었다. 당시 그는 후이산(惠山) 점토인형 제작기술을 배워 <서상기(西廂記)>, <모란정(牡丹亭)> 등 희곡 속의 인물을 빚기도 했다. 엄격하고 진지했던 우카이청(吳開誠) 선생은 더 나아가 조형 예술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중국 국가박물관 앞의 <공자>상 [사진=인민화보 친빈(秦斌) 기자]


1987년 우웨이산은 난징(南京)사범대학교 미술학과에 들어가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베이징대학교에서 연수하고 네덜란드로 건너가 외국 동료들과 교류했으며 방문학자 신분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가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축적하면서 ‘사의(寫意)조소’ 유파를 만들었다.

문화와 마음으로 혼을 빚다

우웨이산은 한 나라의 부흥은 경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물론 경제도 중요하지만 영혼과 민족의 지혜도 중요하다”면서 “그 중에서도 문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당연히 민중이고 위대한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가 바로 민중의 대표이며 문화의 대표”라고 정의했다. 그는 조각을 하기 위해 수많은 문화 대가들을 만났고 문화 명인을 모델로 한 조소 작품 400여 점을 만들었다.

페이샤오퉁(費孝通), 양전닝(楊振寧), 지셴린(季羨林), 첸웨이창(錢偉長), 빙신(冰心), 샤오첸(蕭乾) 등 문화 명인들의 인생 경험과 학술 관점을 들었던 우웨이산은 “나는 이들의 인생 정수를 얻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공자 상을 조각할 때 자신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고서적에는 공자의 형상에 대한 기록만이 있고 당나라 오도자(吳道子), 송나라 마원(馬遠)은 공자를 그림으로 남겼지만 일반인의 마음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자의 인상이 있다. 결국 우웨이산은 당대의 저명한 철학가이자 교육가인 펑유란(馮友蘭), 저명한 교육가이자 중국사상사 전문가인 쾅야밍(匡亞明)에게서 그 모습을 찾았다. 특히 펑유란이 풍기는 유교적 분위기와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쾅야밍의 넓은 이마에서 공자의 이미지를 잡아냈다.

우웨이산은 공자를 ‘인자하고 박식한’ 연장자로 묘사했다. 1994년 제작한 공자 흉상은 머리가 약간 앞으로 숙여져 있어 공손하면서 아량이 넓어 보인다. 반원체의 몸은 유가의 중화(中和)를 암시하며 옷 주름은 음각선으로 표현해 고풍적이다.

저명한 고전주의 조각가이자 영국왕실초상조형가협회 회장인 안토니 스톤즈는 이 공자 상을 감상한 후 “여기 앉아서 공자를 보고 있노라니 ‘그가 바로 이렇구나, 볼수록 이렇구나, 저렇게 아득하구나’라고 느꼈다. 중국 문화라는 강의 원천을 보는 것과 같았다”라는 소감문을 남겼다.

조소에 담긴 인간의 공통적 감정

2005년 우웨이산은 장쑤성 인민정부의 초청으로 ‘난징대학살 희생자 기념관’을 위한 조소 작품을 만들었다. 이 기념관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희생자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시설이다.

작품을 구상하면서 우웨이산은 역사에 대한 깊은 생각, 그리고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를 찾아가 느낀 것들을 작품 속에 담았다. 역사를 기억하지만 원한은 잊고 세계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인류 역사라는 측면에서 개인의 감정을 민족과 인류의 감정에 융합시켰다.

그는 <가파인망(家破人亡)> <도난(逃難, 피난)> <원혼납함(冤魂呐喊, 억울한 영혼의 고함)> <승리지장(勝利之牆, 승리의 벽)>이라는 제목으로 총 4개의 조소 작품군을 만들었다. 이중 <피난>은 조각 군상으로 10세트 21개 인물을 물 속에 넣어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에 놓았다. 조각상에는 여성, 어린이, 노인, 지식인, 일반시민, 승려 등이 있다. 이 길을 걸으면 마치 도망치는 영혼과 만나는 것 같고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도난>(조각 군상) [사진=인민화보 친빈(秦斌) 기자]


이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우웨이산은 생존자들을 방문했다. 생존자 창즈창(常志強) 씨는 “어머니가 일본 침략군의 총검에 찔려 죽는 것을 목격했다”며 “동생의 눈물과 어머니의 피와 젖이 함께 얼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미 70년이 지났지만 80이 넘은 노인은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통곡했고 악몽에 잠을 설쳤다.

“나에겐 간절한 바람이 있다. 원통하게 죽은 망령들을 되살리는 것이다.” 우웨이산은 마지막 한 방울의 젖을 아기에게 먹이는 창즈창 씨의 어머니를 조각상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80세 노모를 부축하고 도망가는 아들이 찍힌 당시 사진을 모티브로 삼아 조각상을 만들었다.

조각상들을 만드는 동안 그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떨리는 두 손이 30만 원혼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작업 내내 그들을 위로하고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피난>은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전시됐고 큰 상도 많이 받았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물리학자인 양전닝(楊振寧)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조소다”라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조소가이자 디자이너인 로베르토 루기우는 이 조소 군상을 보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떨림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웨이산이 추구하는 가장 강력하고 침투력 있는 예술 효과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고, 재난을 당한 동포에 대한 동정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면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전세계에 잘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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