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조합 수준이었던 인천 객주회의 정신은 1897년 인천항 신상협회에 승계되었다.
신상협회는 서상목·서상빈·박명규 등이 발기하여 인천의 객주업체와 사회유지 50여명을 회원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단순히 상인들로만 구성된 단체가 아니라 관료출신과 사회명사 등 진신(縉紳)도 이에 가담했다.
1899년(광무 3) 신상협회는‘신상회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본 상인들도 이에 맞서 1908년(융희 2) ‘인천곡물협회’를 설립하고 ‘미두취인소’와 합세해 신상협회에 대항했다.
신상협회는 미두취인소나 곡물협회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외국 상인들 특히,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대항해 민족상인의 상권을 옹호하고, 민족상인의 사업 자세를 혁신코자 촉구하였으며, 학교를 설립하거나 지방교육기관을 지원하는 등으로 당시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한 측면인 육영사업(育英事業)을 지원했다.
이후 인천항 신상협회는 1905년 7월 근대적 성격의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仁川朝鮮人商業會議所)로 계승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상업회의소와 합병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 8월 인천상공회의소로 자리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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