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13년의 시간, 15만 어휘 1650만자의 사전. 이경원 교수가 무심결에 한 약속을 지키느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강제 노역’ 상태에 놓아둔 것은 바로 이 사전 때문이다.
일년 전, 그가 심혈을 기울여 편찬한 <중중한사전(中中韓辭典)>이 마침내 세상에 나왔다. 이경원은 이날이 자신의 생각했던 것보다 이렇게 늦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방문학자로 있는 베이징외국어대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멀리서 그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어깨에 큰 숄더백을 메고 가쁜 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상자를 들어주려고 하자 그는 “조심하세요. 아주 무겁습니다”라고 말했다. 확실히, 이 사전은, 두 권이라,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들어야 옮길 수 있었다.
전공 바꿔 타이완 유학까지
이경원은 1985년 한국 한양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원래 한국문학을 공부하려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선견지명이 있었던 한 교수가 그에게 “중국은 큰 나라다. 중국어를 배우면 앞으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결국 이경원은 전공을 바꿨다.
1980년대 한국 대학의 중문과 교수들은 타이완(台灣) 유학파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학과의 커리큘럼은 타이완 대학 중문과와 거의 다름없었다. 한 학기에 중국어 과목이 겨우 한 두 과목 밖에 개설되지 않은 형편이었고 당연히 실용회화보다 고전문학을 더 중요시했다. “<논어>와 <시경> 까지도 두루 배웠다. 하지만 졸업해 보니 4년 동안 중국어를 배웠지만 일상적인 회화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학생이 그저 ‘안녕! 밥 먹었니? 이름이 뭐니?’ 세 마디 밖에 할 줄 몰랐다. 중국 문화, 중국 역사, 무역 중국어 같은 과정은 접해본 적이 없었다.”
이경원은 타이완사범대학에서 당대(唐代) 자양학(字樣學)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그는 논문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한다. “만들어진 문자는 이미 역사가 되어 다시 수정할 수 없다. 한국, 중국, 일본 같은 한자문화권 국가가 당대의 자양학 정신을 모방하여 문명이라는 이기(利器),즉 컴퓨터를 통해 규범하고 통합할 수 있다면 한자문화권의 한자 표준화는 성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경원은 스스로를 ‘잡가(雜家)’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잡학다식에 대해 기억력이 좋아서라고 말했다. 그는 뉴스에서 나온 단어와 구절을 선택적으로 노트에 적어놓고 다음에 다시 보면 단번에 기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이런 능력은 이후 사전 편찬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사전의 고해(苦海)’에 뛰어들다
이경원은 자신이 사전 편찬과 인연을 맺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양대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던 그는 어느 날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이 선생,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말씀해보세요.”
“사전 편찬 작업이 있는데 책임자가 암 진단을 받아서 작업을 계속 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이 선생이 해줄 수 있을까요?”
이 사전 편찬 프로젝트는 에듀월드의 BESTA전자사전(누리안 전자사전의 후신)에서 기획한 것으로, 이 회사 사장 정선희와 원래 편찬 책임자는 모두 그의 둘도 없는 친구이다. 책임자가 중병으로 중도 하차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사전 편찬의 바통을 넘겨 받은 이경원은 사전이라는 운명의 배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동참한 학자들이 한국측 주편인 김억섭, 나윤기, 이규갑, 하영삼, 중국측 주편인 차오쥔빙(曺峻氷), 왕핑(王平), 뤄징민(駱敬敏), 타이완측 주편인 쉬탄후이(許錟輝) 차이롄캉(蔡連康) 등이다. 이들 역시 미래에 닥쳐올 고생에 대해서는 손톱만치도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현존하는 최초의 중국어, 한국어, 중한 풍토와 인심, 규장 제도 등을 기록한 사전은 중국 북송시대의 손목(孫穆)이 편찬한 <계림유사(雞林類事)>다. 이후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이 편찬한 역학서 시리즈가 있다. 1980년대 들어 한중 경제 문화 교류가 잦아지면서 고려대학교가 편찬한 <중한사전>이 출간됐고 두산동아의 <중한사전>, 교학사의 <현대중한사전> 등 중한사전이 속속 발간됐다.
기존 사전을 바탕으로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기 위해 이경원은 중한 양국의 각 분야를 아우르는 기본에 충실하고 내용이 참신하고 풍부한 백과형식의 사전을 편찬하기로 결정했다.
2003년부터 그는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진도는 교학과 일상 생활의 잡무 등으로 지지부진하였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 사전 편찬에 더욱 집중하기 위하여 주편진 가운데 이경원, 김억섭, 나윤기 등 세 사람은 미국행을 감행하게 되었다. 2008년 8월부터 1년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버클리 중국연구센터에서 사전 편찬에 몰입하였다. 그 결과 2009년 9월 드디어 <중중한사전>, <한한중사전>의 전자판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경원은 “현재 우리 사전처럼 형식과 내용이 체계적이고 참신하고 전면적인 사전은 없다. 비록 보상은 하잘것없겠지만 이용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우리의 공덕은 무량할 것”이라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격려했다.
사명감으로 일궈낸 성과
대학 교수인 이경원은 그냥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0여 년을 사전의 수렁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 사전은 그만의 안식처가 되었으며 그에게는 사전 편찬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는 기념비가 됐다.
사전 마지막 교정 기간 동안 장시간 작업으로 인해 그는 건강이 매우 쇠약해졌다. 탈진상태에 이르러 무려 네 차례나 응급실에 실려갔다. 바로 이 시기에 이경원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단어인 ‘사명감’을 느꼈다. “사명감이라는 단어는 말하긴 쉽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말 체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출판 1년 전 나는 정말 체험했다. 당시 나는 내 목숨이 끝에 달했다고 느꼈다. 심신이 쇠약했고 경제적으로도 쪼들리게 되었지만 바로 그때 나는 ‘사명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건강을 잃고 돈에 쪼들려도 사전만큼은 반드시 끝내야 했다.”
애초에 가족은 그가 목숨을 내걸고 일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아내와 딸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같은 교수인 아내도 그의 교정을 도왔고 중국어를 모르는 딸은 색인 교정을 도왔다.
2015년 여름, 묵직한 <중중한사전>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판 1000권을 인쇄하여 그 중 한국의 대형 도서관에 납품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인들과 중한 양국 학계 인사들에게 아낌없이 증정하였다.
다른 8종의 사전인 <중중사전><중한사전><한한중사전><한중사전><유의어판별사전(近義詞辨析辭典)><성어고사사전(成語故事辭典)><인명지명서명사전(人名地名書名辭典)><한자자원사전(漢字字源辭典)>도 속속 선보일 예정이다. 현재 <한한중사전>은 출판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중중한사전> 발간사에서 그는 “이중 언어 풀이 사전은 일반적인 중한, 한중 사전의 한 방향 풀이가 아니라 중국어와 한국어의 양방향 풀이”라고 소개했다. 즉 중국어{한국어} 표제어를 순서에 따라 열거하고 다시 중국어{한국어} 풀이와 한국어{중국어} 풀이를 열거하여 이중 언어 풀이 체계를 과학적으로 구축해 독자가 풀이 대조를 통해 중한 두 언어 간의 다른 점과 그 연계성을 인지하도록 했다. 또한 중국어의 다의성 때문에 같은 단어라도 다른 언어 환경에서 다른 의미와 용법이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 이 사전은 단어의 사용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 풀이를 하여 독자가 실제 상황에 따라 선택해 사용하도록 했으며, 동시에 독자가 읽고 기억하고 파악하기 쉽도록 했다. 실제 언어 환경에 가깝도록 해 사용자의 중한 단어, 구절의 응용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사전의 정가는 50만원이다. 이경원은 “컬러 인쇄를 했고 제일 좋은 성경용 종이로 인쇄해서 원고료를 제외하고도 비용이 20만원 정도 들었다. 극소수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큰 돈을 지불하고 사전을 사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아예 사전의 가치를 더 높게 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때 받는 사람이 사전의 귀중함과 가치를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중중한사전>이 편찬되면 개선될 줄 알았던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8종의 사전을 계속 편찬하느라 이미 또 거액을 투입한 상태다. 편집 완료된 사전 콘텐츠를 네이버, 다음, 바이두 같은 포털사이트에 온라인 서비스로 제공할 계획이었지만 종이 버전 사전이 먼저 나와야 협력을 논의한다는 게 전제였다. 따라서 현재 그는 이미 완성된 전자판을 다시 지물판으로 수정 보완 변환하는 작업에 여념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경원은 차분하고 담담해 보였다. 그에게 사전 편찬은 더 이상 방대한 작업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가장 어려운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남은 것은 시간 문제뿐인 것처럼 보였다.
13년 동안의 사전 편찬 작업을 그는 ‘고역’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해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요즘에 사전 같은 공구서(工具書)는 무료 사용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장차 사람들이 콘텐츠를 존중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선진적인 시대가 도래하여 ‘지식이 보상받는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을 맺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중중한사전>을 기자에게 선물해주었다. 들고 가기 편하도록 그는 흰색 배낭까지 준비해주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는 제안에 그는 “잠시만 기다리세요. 중국 전통의상으로 갈아입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그는 사전 편찬 13년 동안 흘린 땀과 마주했던 어려움보다 지금 이 순간의 묵직한 성취감이 더 만족스러운 듯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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