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오랫동안 살았다는 외신기자의 눈에 비친 촛불집회가 16일자 언론에 조명돼 유심히 읽었다. 그의 인터뷰 주요 내용은 촛불집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촛불집회가 해가 바뀌어도 누그러지지 않고 이어지자, 촛불집회에 대한 여론의 변화를 전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논지는 한마디로 광장 민주주의는 이제 대의 민주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법에 따른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기조다.
언론들은 특히 외부 칼럼 등의 형태로 촛불집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하는 대신 제3자적인 시각을 통해 촛불집회가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든 언론이 그런 대열에 동참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언론들은 이른바 보수를 자처하는 집회의 보도 비중을 점차 늘려 촛불집회와 동격의 위치에 놓고, 경찰은 한발 더 나아가 보수단체 집회 참석자가 촛불집회 참석자를 넘어섰다는 발표를 서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큰 흐름에 대한 반동의 물결은 존재해왔고, 촛불집회 역시 도도하게 흐르던 구체제의 물결에 대항한 반동으로 시작됐다. 점차 주류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라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그동안 12차례에 걸친 촛불집회를 이제 그만하고 그 민심을 받드는 대의 민주주의가 바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기대는 것이 바로 법준수다.
앞서 언급했던 외신 기자도 이제는 법에 따라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다만 그의 주장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법을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금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법정에서 진술한다. 청문회에 불려나온 최순실 게이트 관련 핵심 인사들의 증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한국에선 검찰 등 사법당국의 법집행이 공정하지 못하게 적용됨에도 불구하고 법적 만능주의가 등장하는 배경을 알지 못하겠다.
촛불집회를 통해 민심이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음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검찰은 이번 사건을 최순실게이트로 한정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박근혜와 재벌총수간 야합을 끝내 밝히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은 또 박근혜 대통령을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이라고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듯이.
촛불집회가 지속되지 않았다면 특검이 탄생되지도 않았을테고, 국회의 탄핵열차조차 지금처럼 종착역에 이르기는 커녕 아직도 출발 준비로 시끄러웠을 것이다.
촛불집회는 어느 순간에도 법을 뛰어넘겠다고 밝힌 적이 없다. 오히려 법을 제대로 적용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본질이고 핵심이란 것을 천명하려는 것이 촛불집회였다.
결국 법을 집행하는 이들도 사람이었기에, 권력에 길들여진 잣대가 아니라 법이 애초에 정한대로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것이 민심이고, 그 민심의 발로가 바로 촛불집회였다.
더 이상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법이 적용될 여지를 없애고,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라는 외침이다. 촛불집회 참여자들은 서구적 잣대와 크게 다른 집시법을 지키며 매주 휴일을 반납하고 거리로 나선다.
독재국가를 제외하고 어느 나라에서 집회와 시위를 한다고 도로를 차벽으로 쌓고 있는가? 어느 나라에서 경찰이 물대포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해 무고한 시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또 어느 나라에서 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영문도 모른채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후진적인 체계를 가졌는지?
야생의 고래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국가가 가진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는 나라의 제도와 법이 한국에서도 유효한지도 묻고 싶다.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권력이나 돈이 없으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해온 것은,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회체계와 관습때문이라는 자각에서 촛불집회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자신들이 법의 형평성에 벗어나 억울함을 당하고 억압의 굴레에 짓눌린 기억이 없다고 이 땅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치부하고 '이제는 그만해도 됐다'고 하는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촛불민심을 재단할 권능을 부여받지 않았다. 촛불민심은 '스스로 됐다'고 판단할 때 스스로 촛불을 내려놓을 것이다.
[박원식 부국장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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