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사러 간 손님이 약국에 머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떤 약이 필요한지, 복용법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가격은 얼마인지 등에 대한 대화가 오가는 데는 고작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처방전에 따른 약 조제라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순 있겠지만 대개 약국은 서둘러 들어갔다 나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 약국은 이상하다. 하루에 받는 처방전은 평균 3건에 불과한데도, 손님들은 마치 이곳을 사랑방처럼 여기고 약사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심지어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이 약국을 찾는다. 이뿐일까. 약국 내에 마련된 넓직한 별도의 공간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테이블과 책장을 밀어내고 의자를 들이면 70명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이곳에선 1년에 한번씩 음악회가 열린다.
국내 2만여 개의 약국 가운데 이렇게 '별난' 약국이 또 있을까. 경북 포항의 한 시골 읍내에 위치한 이 약국엔 생약을 전공한 약학 박사 최복자 약사가 있다.
최 약사는 최근 30년 넘게 약국을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그 약국에 가고 싶다'(책읽는귀족)을 내놨다. 여기엔 소화제 한 병을 사러 와도 구구절절 자신의 신세한탄을 하는 할머니부터 약을 사러 왔던 조폭이 단골이 되어버린 이야기, 말기암 진단을 받은 이장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인 딸의 결혼식까지 다 보고도 여전히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사연 등 따뜻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손님들에게 자상한 친구같은 최 약사도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일하고 있을 때의 내 표정을 동영상으로 찍은 적이 있었는데, 잔뜩 경직된 표정에 꾹 다문 입, 싸늘한 눈초리까지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표정을 바꾸기로 마음먹었고 입 꼬리 들어올리기, 좌우 윙크 번갈아 하기 등 얼굴 표정을 부드럽게 바꿔 주는 운동을 매일 지속했다.
"여기 약사님 바뀌었어요?" "요즘 좋은 일 있으세요?" 손님들의 반응은 대번에 달라졌고, 그는 '손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존중하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팔에 온갖 무늬의 문신을 한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약국에 들어왔을 때 깍듯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대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음속의 창과 방패를 모두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조폭' 손님은 다음날 그의 '패밀리'들에게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혀 최 약사의 약국에 보냈다. "누님, 안녕하십니까! 자, 지금부터 누님 약국에서 필요한 약 다 산다. 알았나?"
최 약사는 "사람의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며 "약을 조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와의 소통은 너무나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런 지론은 그가 걸어온 길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는 약대 2학년 때부터 생약에 심취해 관련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몸이 아픈 이유는 내 안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고, 그 원인은 육체와 정신에 모두 걸쳐 있다'는 생각으로 환자와 꾸준히 교감하며 치료하는 방법에 몰두해 왔다. 지역주민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오는 단골손님들을 위해 늦게까지 약국 문을 열어두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다.
최 약사가 주창하는 '행복한 약국 만들기'를 더 큰 도시에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최 약사는 "오히려 그 반대"라며 "환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명상이나 요가도 할 수 있는 약국을 숲속에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마당엔 동물 놀이터도 마련해 약국을 찾는 동물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속도, 효율, 경쟁 등이 팽배한 이 시대, 그는 오늘도 "직선(直線)이 아니어도 즐거운 삶이 될 수 있다"는 복용법이 적힌 '마음의 약'을 제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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