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로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새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 바로 이 후흐노르, 즉 푸른 호수 일대였다.
여기에 살면서 테무진은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을 갖춰 가는 동시에 초원에 떠오르는 새로운 강자로서의 이미지도 구축하게 된다.
▶ 푸른 호수에 모여든 추종자들
조용했던 이 숲 속의 푸른 호수는 몰려든 테무진의 추종자들로 북적거렸다.
1189년의 일이었다. 오촌 당숙인 알탄을 비롯한 키야트계 귀족들은 테무진을 키야트계 연합정권의 칸으로 선출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테무진에게 칸으로 추대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테무진이 몇 차례 사양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지나간 뒤 이들은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했다.
▶ 죽음을 담보로 한 맹약
이 푸른 호수 가에서 이루어진 충성의 맹약은 이렇게 이어졌다고 몽골비사는 적고 있다.
"테무진이 칸이 되면 우리는 수많은 적 앞에 첨병으로 달려 나가 용모가 빼어난 처녀와 귀부인들을 약탈해 그대에게 바칠 것이다. 타 부족의 볼이 고운 처녀와 부인들도 약탈해 바칠 것이다. 엉덩이가 튼튼한 거세마도 약탈해 모두 그대에게 바칠 것이다. 전쟁을 할 때 우리가 그대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를 비복들로부터, 여자와 아내로부터 떼어 내어 우리의 검은머리를 땅바닥에 내 던져라. 평화로울 때 우리가 그대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면 우리를 모든 가신으로부터, 아내와 자식으로부터 떼어 내어 주인 없는 들판에 버리고 가라! "
죽음을 담보로 한 추종자들의 충성 서약! 특히 서약의 뒷부분은 새로운 세력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충성을 앞세워 추종자들에게 족쇄를 채운 것으로 볼 수 있다.
테무진의 칸 등극! 이로써 그는 곧바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몽골초원의 통합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 푸른 호수 가는 길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70㎞ 더 가면 쳉헤르만다르솜이 있고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푸른 호수로 가는 길이 나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푸른 호수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쏟아 붓기 시작했다. 북쪽 하늘을 보니 시커먼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연속으로 이어진다.
몽골초원에서 간혹 나타나는 연쇄 번개였다.
▶ 수로가 된 길을 따라 북진
갈 길을 서둘러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북쪽으로 전진해 나갔다. 초원을 가르며 나 있던 길은 아예 수로가 된 채 물이 흘러 넘쳤다.
그러나 이내 하늘 절반을 덮었던 검은 구름이 산등성이에서부터 조금씩 자리를 비켜나더니 언뜻 언뜻 푸른 하늘이 보인다.
한참을 내릴 것 같았던 비가 어느 듯 멎어 있었다. 초원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또 한 번 만났다.
▶ 야생화 군락 이룬 초원
분홍색, 노란색, 보라색, 흰색 등 갖가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노란색 군락은 마치 키 작은 유채 밭을 보는 듯하고 분홍색 빨간색 집단은 녹색의 융단 위에 지도를 그려 놓는 듯하다.
자세히 보니 야생화의 종류도 무척 많다. 에델바이스와 청사초롱 등 아는 것은 몇 종류뿐 대부분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후흐노르가 3~4㎞ 남았다는 지점부터 산림과 초원이 뒤섞인다. 후흐노르는 마주보고 서 있는 산 아래쪽에 그 산의 모습을 선명하게 거꾸로 물속에 담은 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게 도착한 목적지였기 때문에 다소 진이 빠졌지만 역사의 현장에 도착했다는 새로운 마음으로 기분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 젊은 칭기스칸이 새겨진 동판
평지의 중앙 부분에는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오보가 만들어져 있었고 사람 얼굴 크기의 계란형 동판에 칭기스칸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 동판에 새겨진 칭기스칸의 모습은 초상화나 비석에서 봐 왔던 것과는 달리 젊고 패기 찬 미남형이었다.
이곳에 살 당시의 칭기스칸 모습을 이렇게 상상해 새겨 넣은 것일까?
▶ 케룬렌강 발원지 가운데 하나
호수 건너편 산에는 칭기스(Чингис)라는 글이 키릴문자(러시아어 알파벳)로 새겨져 있다.
산등성이를 파서 글을 새겨 넣었지만 주변에 풀들이 글자를 덮고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아래로 내려가 호수 쪽으로 접근해 보려 했으나 호수 동쪽 편은 습지여서 발이 그냥 빠져 버린다. 차량은 물론 사람의 접근도 어려웠다.
바깥쪽으로 큰 원을 그리며 나 있는 길을 따라 돌아가서야 맞은 편 산기슭에 이를 수 있었다.
푸른 호수는 그 곳에서 한 눈에 들어 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호수 아래쪽으로 다소 완만한 계곡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계곡을 타고 내려가는 물은 아래쪽에서 다른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합쳐져서 강을 이룬다.
바로 초원에서 여러 번 만나 적이 있는 케룬렌강이다. 이곳은 케룬렌강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 일몰 빛에 젖은 후흐노르
아래쪽으로 확 트인 광경 속에 담겨 있는 푸른 호수는 길이가 5백 미터 넘는 호수인데도 마치 자그마한 연못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 보면 크기도 웬만하고 물살이 일지 않는 잔잔한 수면이 만만치 않은 수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쪽에 걸린 해가 산을 넘어가면서 황혼 빛을 수면으로 뿌린다. 호수는 수많은 황금빛 비늘을 만들어 내면서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간다.
적어도 지금 이 시각에 보는 호수는 푸른 호수가 아니라 붉은 호수였다.
그 속에서 8백 년 전 이곳을 터전으로 살았던 테무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둠이 내린 초원을 빠져나왔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