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6] 바다 뱃길은 어떻게 열렸나?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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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2-1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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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정크교역권의 형성

[사진 = 정크선]

황소의 난 이후 외국인에 대한 배척 기운이 강하게 일면서 무슬림 상인들의 상당수는 중국의 관습을 적극 받아들이며 중국화돼 갔다. 물론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무슬림의 중국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이제는 반대로 중국인들이 그들의 배인 정크선(Junk船:戎克船)을 타고 남쪽 바다로 진출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사진 = 정크선]

다우교역권에 대비되는 이른바 정크교역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남송이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소나무나 삼나무로 만들어진 정크선은 선창을 열 개정도의 격벽으로 나누어 만들어졌다. 마르코 폴로는 이는 한 선창에 물이 스며들더라도 배가 침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틈새는 석회로 메워 누수를 방지했다. 큰 정크선은 3백 톤 규모로 한꺼번에 5백 명 전후가 탈 수 있었다.

▶ 다우․정크 교역 공존시대

[사진 = 정크선 모형(북경 역사박물관)]

지난 73년 천주만(泉州灣) 나루터 개펄에서 발굴된 침몰 정크선은 2백 톤 규모로 인양된 선박은 천주에, 그 모형은 북경 중국 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중국인들의 교역활동은 나중에 말라카 해협을 넘어 인도양까지 진출하게 된다. 말하자면 다우교역권과 정크교역권이 공존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무슬림의 중국 진출이 시작된 시기를 1차 항해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두 교역권이 공존하는 11세기에서 14세기까지는 2차 대항해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쿠빌라이가 꽃피운 해상교역
중국 대륙 쪽에서 보면 이 시대를 연 것은 남송이었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꽃 피운 것은 쿠빌라이였다. 남송은 모든 것을 거의 민간에 맡겨두고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에 비해 쿠빌라이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이를 주도하고 조직화했다. 쿠빌라이는 우선 해양 전문가 집단이 이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이들과 손을 잡고 바다의 시대를 열어 가는 방법을 택했다.
 

[사진 = 중국 화교사원 무슬림]

가장 적합한 집단은 역시 중국 땅에 토착화돼 가고 있던 무슬림 집단이었다. 남송의 해양진출은 거의 모두 이들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고 상권 역시 이들의 손에 있었다. 그러니 바다와 교역에 대한 전문가 집단을 활용하는 방법은 바다를 장악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쿠빌라이는 이점을 꿰뚫어 보고 이들 무슬림 세력에게 손을 내밀었다.

▶ 포수경이 앞장선 해상 진출

[사진 = 중국의 무슬림]

그 중심인물이 천주(泉州)를 거점으로 삼고 있던 이슬람인 실력자 포수경(浦壽庚)이었다. 포수경의 6대조가 사천(泗川)지방에서 중국 동남 해안의 광주(廣州)로 옮겨온 것을 보면 배를 타고 중국 동남 해안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은 다른 무슬림과 달리 그의 조상은 육지를 통해 중국 땅에 들어 온 회족(回族)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대에 천주로 옮겨온 그의 가족은 해적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포수경은 천주의 무역 사무를 관리하는 장관인 제거시박(提擧市舶)에 등용됐다. 30년 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포수경은 해양통상을 대표하는 실력자로 자리를 굳혔다. 몽골군의 남송 작전 때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켰으나 남송군이 선박과 군자금을 강제 징용하는 데 화가 나 남송 토벌에 가담했다.

그 때 세운 공의 보상으로 행성중서승(行省中書丞)에 임명됐다. 쿠빌라이 정권이 해상진출과 해양무역을 위해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며 손을 내밀자 포수경은 즉각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포수경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강력한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나선다면 바다 진출과 해상 교역은 순풍에 돛 단 듯이 확대되고 발전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 국제무역 중심지 천주

[사진 = 천주]

실제로 쿠빌라이 정권과 무슬림 세력이 서로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서 대원제국의 해상진출은 급속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바다로 나가는 동쪽의 기지는 역시 포수경이 포진하고 있는 천주였다. 서쪽에서 들어온 보석과 진주 그리고 값비싼 상품들은 주로 천주에 부려져서 대원제국의 각지로 보내졌다.
 

[사진 = 적수담 수로]

양주와 항주 등 장강 입구의 항구로 보내진 상품들은 다시 경항대운하를 타고 쿠빌라이가 있는 대도의 적수담까지 보내졌다. 일단 천주에서 10%의 세금이 징수된 화물은 다른 곳에서 다시 징수되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상품들은 복잡한 절차 없이 제국 각지로 신속하게 수송될 수 있었다. 당시 천주에는 1만 5천여 척의 배들이 수송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하니 가히 활발했던 해상교역의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과거 국제무역항으로서 명성이 높았던 천주지만 지금은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는 잃어 버렸다. 천주가 과거의 명성을 잃게 된 것은 하천의 토사가 흘러들어 수심이 얕아진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또 배들이 상대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점차 그 기능이 쇠퇴했다는 설명도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당시 천주는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중동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장악한 핵심 도시였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 마르코 폴로가 지나간 몽골의 바닷길

[사진 = 팍스 몽골리카]

1290년 마르코 폴로가 이끄는 14척의 선단이 천주를 출발해 서쪽 훌레구 울루스, 일한국으로 떠났다. 훌레구 울루스 왕실로 시집보내는 몽골 왕녀를 대동한 이들 일행은 동서 무역로 주변에 있는 여러 항구에 기항하면서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거쳐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에 도착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의 선단이 26개월에 걸쳐 지나간 뱃길이 바로 몽골의 영향 아래 장악된 바다로의 길이었다.

마르코 폴로였는지 누구였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몽골이 장악하고 있던 뱃길을 통해 왕녀를 태운 함대가 중동지역으로 향했던 것은 확실했다. 남송 전쟁과 대도 건설에서부터 시작된 바다 제국을 향한 쿠빌라이 정권의 꿈은 이처럼 넓은 바다를 품에 안으면서 현실화 됐다.

이제 쿠빌라이 정권은 바다와 육지를 함께 연결하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교역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유라시아 대교역권의 형성은 단지 이 지역 안에서의 교류에 그치지 않고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단계로 옮겨가면서 인류 역사 자체를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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