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6/20180326233955370902.jpg)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25600151770.jpg)
[사진 = 카자흐 알마아티]
그런데 몽골은 왜 그 속으로 편입되지 않았을까? 몽골의 경우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이라는 걸림돌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민테른, 중국 1차 국공합작 유도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25831613816.jpg)
[사진 = 중국 공산당 홍군 지도자(뒷줄 첫째가 모택동)]
코민테른은 1920년 2차 대회에서 레닌이 제기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근거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국공합작 노선을 제기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 혁명을 이루기 위해 국민당과 제휴하겠다는 입장을 보인데 대해 반제(反帝)와 반(反)봉건 노선을 취해온 국민당도 동의하고 나섰다.
그래서 1924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1차 국공합작이다.
국민당은 1,924년 1월 연소(聯蘇 :소련과 연합), 용공(容共:공산당과 제휴), 농공부조(農工扶助: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원조) 등 3대 정책을 채택했다. 이것이 1차 국공합작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그러나 1차 국공합작은 당 대 당(黨 對 黨)의 합작은 아니었다.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개인자격으로 입당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국공합작을 이끈 인물이 코민테른의 대표 마링이었다. 그는 국민당이 여러 계급의 연합정당인 만큼 개인 자격으로 입당하더라도 국민당과 합작할 것을 공산당에 종용했다.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25942863469.jpg)
[사진 =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모택동(1923년)]
▶몽골 운명, 국공합작이 변수
그러는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회복됐다. 당시 소련으로서는 국공합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은 몽골에 대한 상황을 조급히 결정지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2423122902.jpg)
[사진 = 몽골과 러시아 회담 대표(몽골 국립박물관)]
실제로 당시 몽골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당 중앙위원장으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던 담바도르지는 그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소련이 몽골에 대해 취한 자세는 애매모호했다. 앞 뒤 과정을 살펴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2610676418.jpg)
[사진 = 몽골국가 인장(몽골 국회의사당)]
그리고 그 내용을 담은 중․소 대강협정(大綱協定)을 1,924년 5월 체결했다. 이는 분명히 외교적으로 모순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소련은 동아시아 정세 자체를 과도기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당국자나 코민테른 관계자는 이를 그다지 모순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체제, 몽골인민공화국 출범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2512373650.jpg)
[사진 = 몽골 인민당 인장]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2804300548.jpg)
[사진 = 울란바토르 외곽지역]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2842593186.jpg)
[사진 = 울란바토르 전경]
몽골의 상업과 산업은행이 세워지고 정부산하 경제위원회가 개설됐다. 몽골 인민공화국의 출범으로 이러한 개혁에 속도가 더 붙으면서 점차 사회주의국가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래서 1,924년은 몽골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이해에 일어난 일들을 차례로 정리하면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시작되고 다수의 코민테른 요원이 여기에 참가했다. 이어서 소련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회복된다. 여기서 소련은 중국의 외몽골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다. 또 외몽골에서는 코민테른의 지도아래 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 의미 있는 1924년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2921307473.jpg)
[사진 = 레닌의 장례식]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2952364430.jpg)
[사진 = 레닌묘 옆에서 스탈린]
▶국공합작 결렬로 사라진 통합의 꿈
1911년 복드칸 정권이 독립을 선언할 때 제외됐던 내몽골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몽골의 몽골인민공화국과 연락을 취하고 코민테른과도 접촉했다.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3025673373.jpg)
[사진 = 중국 시진핑주석, 장가구 방문]
![](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3/27/20180327133054272450.jpg)
[사진 = 202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장가구]
하지만 1927년 1차 국공합작의 결렬은 모든 것을 흩트려 놓았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