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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일본은 소련과의 이 대규모 전투를 중국 쪽의 지명을 붙여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의 무기와 장비 그리고 전투기가 동원된 전쟁 수준의 전투를 ‘사건’이라고 축소시켜 놓은 것만 봐도 이 전투가 어떻게 전개돼 나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중국 공습을 통해 우세한 공군력을 과시했던 일본군은 초반전에 자신만만해 있었다. 그래서 대규모 공습을 통해 전세를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이 아니어서 거칠 것 없었던 일본군도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소련과 부딪치면서 제대로 임자를 만나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지역 상공에서는 대규모 공중전이 펼쳐졌다. 실제로 이 공중전에서는 일본이 판전승을 거두었다. 공중전에서 격추된 일본의 항공기는 160여 대였으나 격추된 소련 항공기는 4백 여 대에 이르렀다.
▶육군 대결에서 일본군 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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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쥬코프 소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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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군과 소련군 조각상]
7월 들어 일본군 만 여명이 소련군을 공격했으나 소련군에게 대패하고 4-5일 만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8월 20일 주코프는 5만 명을 동원해 도강기동작전을 착수했다. 5백여 대의 전투기는 대규모 폭격작전도 병행했다. 지상군의 전력에 있어서 일본군은 소련군의 상대가 아니었다.
소련군은 소형전차의 집단공격과 함께 대규모 야포 사격을 동원해 일본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중국군과의 전투에 사용했던 경 장갑차와 경무장 장비를 그대로 들고 나와 전력에서 한 단계 뒤쳐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용감한 돌격만으로는 기계화된 군대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시이 부대의 첫 세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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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할힌골전투 기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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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할힌골전투 기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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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할하강]
▶일본군 5만 명 사망
그해 9월 엿새 동안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는 일본의 완전한 참패로 끝났다. 일본군 주력부대는 거의 궤멸상태로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은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속에는 적지 않은 조선인 징용군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포로들이 붙잡혀 울란바토르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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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일본인 포로 건설, 울란바토르 국립도서관]
최근에도 일본은 추모단을 울란바토르에 보내 당시 숨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를 가지고 있다. 몽골이 쿠빌라이 시대 일본원정 도중 태풍을 만나 숨진 몽골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일본 근해에서 추모제를 추진하는 것과 맥락은 같을 것이다.
▶2차 대전 후 역사방향에 큰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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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할힌골 전투 기록 사진]
그러면서 러시아의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 정복의 꿈을 접는다. 북쪽 영토를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 대신 일본은 중국에 주력하면서 동남아와 태평양 침공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종전을 합의한 다음날인 9월 17일 스탈린은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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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소련군 베를린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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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할힌골의 취재차량]
그렇게 본다면 할힌골전투는 2차 대전과 그 이후에 펼쳐진 역사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전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영국의 저명한 전쟁사가인 런던대학의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교수는 최근 그의 저서 ‘2차 세계대전’에서 2차 대전의 시작은 통상 알려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바로 할힌골 전투라고 주장했다.
그는 히틀러의 생사를 건 소련과의 전쟁에서 할힌골 전투는 지정학적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지적했다. 히틀러가 일본에게 소련의 극동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전혀 응하지 않은 것은 할힌골 전투의 쓰디쓴 기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할힌골전투 승리가 독일과 일본의 소련에 대한 협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2차 대전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참패한 이 전투를 국내에는 알리지도 않고 덮어버려 일본인들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에야 이 전투의 결과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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