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공감하고 대부분 변화를 수용하고 있으나, 예행연습을 통해 일부 문제점을 포착한 기업은 보완책 마련에 난감해하는 모양새다. 특히나 근무형태가 다양하고, 산업별 특수성이 큰 상황에서 경직된 근로기준을 일괄적으로 적용하기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 "기업의 고민, 정부도 같이 고민해야"
5월 30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고용노동부가 주최한 한 행사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과 관련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며 "정부도 고민하지 않겠나. 아니 해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 기업의 수장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어려운 국내 문화에서 작심 발언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2~3년에 한 번씩 단행하는 정기보수 기간에 인력을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이 많다"며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남들이 하고 있는 것 다해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총괄사장이 이처럼 고민하는 이유는 정유업계의 특성 때문이다. 정유사들은 최소한의 인력으로 대규모 설비를 운영하는 장치산업의 특성상 대규모 정기보수 기간에는 주당 70~80시간의 집중근무가 불가피하다. SK이노베이션 울산공장,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등은 당장 올 하반기 대보수를 앞두고 있다.
4차 산업의 핵심인 ICT(정보통신기술)업계에서도 볼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한 '근로시간 단축 관련 ICT 업계와 현장 소통 간담회'에서 ICT업계 종사자들은 24시간 시스템 운영, 장애처리, 비상근무 등 업계의 특성을 고려해 탄력적 근로시간제 운영기간 확대 등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SW(소프트웨어)산업협회도 이날 SW업계를 대표하는 협·단체 10곳과 함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고용노동부,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등 관계기관에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된 보완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전달했다.
SW업계는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수주형 사업 중심이며, 지속적인 유지관리·운영이 필요한 SW산업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아 제도 시행 후 SW시장이 위축될 것이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수주형 SW개발사업은 사업 과정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발주자의 요구사항을 반영하기 위해 사업 종료 시점에 불가피한 초과근무가 빈번히 발생하는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 근로시간의 유연한 적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탄력 근로시간제 개선 필요"
재계 관계자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을 완화해 이들 기업들이 움직일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줘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삼성과 현대, SK, LG 등 국내 주요 그룹들이 선택적 근로시간제, 유연근무제 등을 선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 회사들도 경쟁력의 핵심인 R&D 등 특수성이 있는 부문에 대해서는 아직 고심이 많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일과 삶의 균형도 이루고 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최장 3개월로 정해진 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일본의 기업들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1년 단위로 쓸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요구에도 정부는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사용 횟수 등 노사가 선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상대적으로 많다는 견해다.
임종화 경기대학교 무역학과 교수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시대적 화두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서도 “다만 치열한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을 도울 수 있는 부분도 정부가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