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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서울 용산 주한미군 본부 사령부. 지난 1년 6개월 머나먼 이국 타향에서 군 자동차 정비병으로 일해온 일병(PFC) 워너메이커는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헤이 브러더 승재, 나 이거 이태원에서 맞췄어. 300달러 줬어.” 태어나 처음 맞춤 양복을 해 입은 파란 눈의 젊은이의 으쓱대는 어깨 위 목덜미에는 금색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미국 중북부 시골 '깡촌' 출신 워너메이커는 고교 졸업 후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육군에 지원했다. 3개월 훈련캠프를 마치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대 배치를 원했지만 빨리 학비를 벌기 위해선 해외 미군기지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동료들이 가고 싶어 했던 독일은 탈락, 2지망이었던 일본 오키나와도 미끄러졌다. 그래서 오게 된 이역만리 용산에서 그는 주 3일 기름때 묻은 손을 싹싹 씻고 병영 내 주립대학 분교에서 야간수업을 들었다. 말쑥한 양복 차림, 이제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2년 정도 더 군 복무를 한 뒤 제대해 명문대학에 들어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지난 8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주한미군 주둔비용 가운데 한국이 부담해야 하는 몫을 정한 한·미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에 공식 서명했다. 2만8000여명의 주한미군 유지비용으로 9억2500만 달러(약 1조389억원)를 내기로 한 거다. 지난해 대비 8.2% 증가한 금액으로, 계약 기간 1년 ‘초단기계약’이다.
그런데 이 서명식 당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50%를 더 내라고 했다. 사업가 출신 대통령답게 내년을 포함한 향후 최장 10년치 협상을 염두에 두고 첫 '가격'을 부른 셈이다. 이른바 ‘주둔비용+50(cost plus 50%)'인데, 이 계산대로라면 지금의 3배, 3조원에 육박한다. 300% 인상, 대한민국을 ‘호갱’(호구와 고객의 합성어. 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손님을 낮잡아 이르는 말)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미국의 이익' 최신 사례가 바로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기지다. 주한미군은 최근 성주 기지 내 부지 70만㎡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이 사업계획서를 국방부가 환경부로 넘기면 일반환경영향평가가 시작된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북한 핵실험 등에 맞서 사드 배치를 결정하고 1년 뒤 발사대 2기와 레이더를 성주 기지에 임시 배치했다. 안보와 경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허겁지겁 급하게 내린 결정으로, 중국의 보복조치는 여전하다. 2017년 6월 문재인 정부는 환경영향평가를 임시에서 ‘일반’으로 전환해 절차적 정당성을 얻도록 했다. 한 마디로 사드 배치와 관련, 미국과 ‘밀당’을 시작한 거다. 일반환경영향평가에 걸리는 기간을 감안하면 내년 상반기 중 사드 정식 배치가 최종 결정될 듯한데, 향후 분담금 협상에서 ‘사드'는 매우 큰 의제다.
환경 문제도 있다. 서울시는 “용산 미군기지 주변의 오염된 지하수를 정화하는 데 든 비용을 보전해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10여건을 냈다. 최근 잇따라 법원이 판결을 내렸는데, 모두 서울시 승리. 법원은 “주한 미군이 관리하는 미군 기지 내 유류 저장 탱크와 그 배관에서 누출된 유류 오염 정화 작업에서 서울시가 입은 손해를 국가가 주한미군민사법 제2조에 따라 배상하라”고 했다. 서울시는 나아가 서울 용산 미군기지 주변 지하수에서 유해물질인 벤젠이 기준치의 최대 1170배 초과 검출된 사실을 공개했다. 용산 미군기지 주변 지하수 관측용 우물 62개소에 대한 오염도 검사 결과 27곳에서 지하수 정화 기준을 초과했다. 앞으로 이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군이 범한 환경범죄에 대해 우리 정부가 대신 돈을 내고 있다는 점은 미국을 설득할 ‘명분’으로 충분하다.
주한미군 일자리, 미국의 국익, 환경 이슈 등을 향후 방위비 분담금 협상 테이블에 올리자. ‘비즈니스맨’ 트럼프의 호갱이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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