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기홍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사진 = 동반성장위원회]
2500년 전 고대에 이미 이런 논쟁이 있었다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데자뷔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있어온 자유와 평등을 둘러싼 논쟁이 떠오른다. 절차적·소극적 자유냐, 실천적·적극적 자유냐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자유다. 거기까지가 국가의 역할이다, 해방된 자유인이 실천적으로 자유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느냐의 여부는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국가가 개입하면 자유는 왜곡된다. 반면에 평등주의자들은 반론한다. 아니, 굶어 죽을 자유도 자유란 말인가? 실천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단순한 절차적 자유는 허구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실천적으로 자유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원론적으로는 둘 다 옳은 말이다. 다만 구체적 현실이 어느 쪽 주장에 무게를 실어줄 만한 상황인지가 남을 뿐이다. 문제는 현실에 대한 상황판단이다.
묵자와 그 제자들은 당시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이익을 나누어야 할 상황으로 판단했던가 보다. 그랬기에 맹자(孟子)의 “애비 없는 자식(無父者)”이라는 공격에도 “모든 노인을 차별 없이 내 아버지처럼 공경하라”는 가르침을 꿋꿋하게 견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양극화가 감내할 수 없는 지경으로 심화되었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문제는 이 현실이 시장의 자생력에 의해 자연적으로 치유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인식 차이다. 포용성장을 대놓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포용성장을 위한 국가 개입을 놓고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다. 포용성장도 궁극적으로는 시장에 의해 달성되어야 하기에 국가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원론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궁극적이다. 당장은 아무래도 좋다는 말인가. 또한, 지금의 양극화가 일시적 현상인가, 아니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현상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나 많은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양극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기술 변화에 따른 구조적 요인 때문에 앞으로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해진다. 포용성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나누어야 한다. (재)분배정책은 국가의 몫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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