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거제 출신이다. 4남 중 셋째. 어릴 적부터 지독하게 가난했다. 빈농의 아들이었지만 머리가 비상했다. 중학교 3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이유는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변곡점에 은사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기우야, 넌 부산고 가라’ 하셨던 중학교 1학년 담임 이명걸 선생님과 ‘넌 틀림없이 합격한다’ 하셨던 중3 담임 김영진 선생님이다.
그는 순진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다. 당시 부산고는 대신중, 경남중 등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만 갈 수 있는 고등학교였다. 그해 거제에서 32명이 부산고 시험에 응시했다. 합격자는 단 한 명. 이 회장이었다.
합격을 하고 나서야 부산으로 유학 갈 돈이 없다는 문제를 알게 됐다. 선생님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가라고 했는데 돈 없어서 못 가는 게 말이 되나’며 물상 선생님이 나섰다. 청학동 누님네 집 방 한 칸을 내준 것이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이른바 ‘입주과외’ 조건이었다.
어렵게 열린 유학길이었지만 수재들만 모인 부산고에서 그는 처음으로 좌절을 경험했다. 1등을 놓치지 않던 거제 섬 소년은 자존심이 상했다. 죽자 사자 공부했고 10등 안에 들었다. 그러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결핵성 늑막염이었다. 심신을 회복해야 했다. 결국 그는 거제로 돌아가 요양에 들어갔다. 1년 동안 그는 미친 듯이 독서에 몰입한다. 학교 공부는 오히려 멀리했다. 김형석 연세대 교수의 ‘영혼과 사랑의 대화’부터 ‘의학대백과사전’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 대입에 실패하고 공무원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하나의 밑바탕이 됐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정상적으로 공부했다면 거기 맞춰 사는 사람이 됐겠죠.”
어릴 적 경험 덕분일까. 그는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다. 아이들을 기계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이들을 전부 학원에 보냅니다. 그렇게 기계로 만들면 정작 자기가 뭘 잘하는지도 몰라요.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져 거기 맞춰서 살고 있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삶이 아닌 거예요. 한 가지 더요, 나를 두고 ‘고졸신화’, ‘9급신화’라 하는 이야기가 사라져야 정말 좋은 사회가 되는 겁니다.” 그 누구보다 교육을 잘 알고 일 추진력까지 갖춘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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