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미·일 양국 정부가 공개한 정상회담의 자료에서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재 문제를 논의한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미·일 정상회담의 공식 의제는 양국의 현안과 북한 문제, 그리고 이란 문제 등의 정도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트럼프와 아베는 미·일 양국의 미래 협력 발전 사안에 집중한 것으로 보였다.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11월 이후 미·일 양국 정상은 지금까지 30차례 이상의 전화통화를 비롯해 12차례 이상 회담을 가졌다. 지금까지 트럼프와 아베는 당면한 양국의 과제에 집중하면서 상호 정책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미·일은 양국의 관계를 세계에서 ‘가장 밀접한 동맹(closest ally)’이라고 노골적으로 자부할 정도에 이르렀다. 양국은 탄탄한 공조체제 수립이라는 결실을 올리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첫째, 일본의 대(對) 미국 자동차 및 부품 수출 문제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일시적으로나마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양국은 정상회담이나 실무 회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긴 했지만 본격적인 협상 개시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협상이 종결된 이후로 미뤄졌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이 대 미국 자동차 수출 문제를 자체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다.
둘째, 2017년 11월 트럼프의 첫 아시아 5개국 순방에서 일궈낸 결실을 구현시키기 위한 미·일 간의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당시 트럼프의 순방은 ‘세일즈 외교’로 알려질 정도로 대규모의 투자와 경제 협력 사업이 체결되었다. 중국과 2400억 달러, 일본과 1100억 달러, 한국과 750억 달러 이상의 투자와 구매 규모의 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는 마지막 방문지인 필리핀에서도 투자와 구매를 요구하는 합의서를 도출했다. 중국과는 무역 협상 타결이 지지 부진하면서 당시 합의된 투자와 경제협력 사업의 실천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이다.
셋째, 아베는 1978년 이후 40년 만에 지난 6월 12~14일 일본 총리로서 처음으로 이란을 공식 방문했다. 그의 역사적 방문이 트럼프의 묵인보다 지지 하에 이뤄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만은 일본 에너지 자원 수급에 관건이 되는 지역이다. 일본은 원유의 85%와 천연가스의 28%를 이 지역에서 수입한다. 아베 총리가 트럼프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강화된 미·일 동맹관계뿐 아니라 트럼프의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재’를 자처한 데 있다.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이 같은 의사를 아베가 피력했고, 방일 당시 트럼프는 이란에 대한 ‘정권 교체’ 의향이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이 메시지를 아베가 직접 전하겠다고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미국과 새로운 질서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선 사이버 안보질서와 관련하여 미·일 양국은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양국의 공조 토대를 마련하는 결실을 올렸다. 사이버 공격의 개념 정의와 방어 문제에 있어 두 나라의 인식이 일치함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미국과 향후 우주개발사업에도 적극 참여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우주정거장 사업은 물론 우주질서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도 더 긴밀한 협력을 결의했다.
미·일 양국의 외교 행보를 보면 우리 외교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의 외교 노력이 북한 문제에 매몰되면서 중견국으로서 실질적인 역량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중견국 외교론을 펼치며 역할 증대에 힘써왔다. 그러나 중견국들과의 진부한 협력과 블록화에 집중하면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판세를 명확히 인지했더라면 우리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에 적극 참여하면서 ‘질서의 수용자(rule-taker)’ 대신 ‘질서의 구축자(rule-maker)’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불행하게도 이런 기회를 북한에 날려보냈다.
일본이 이란 문제에서 중재자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재밌는 사실은 국익을 위해 때로는 ‘하는 시늉(제스처)’이나 행위만 보여주는 ‘뻥카’도 외교에서 먹힐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긴밀한 관계와 돈독한 신뢰 구축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는 결국 외교로 서로의 간지러운 곳을 알아내고 긁어줄 줄 아는 통찰과 혜안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뢰 구축은 정책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상황 변화로 돌출되는 이견은 이런 전제를 토대로 설득력 있고 효율적인 조율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한국 외교가 중견국으로서 이제 ‘세계 질서의 구축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하나의 이슈에 매몰되어 상실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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