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과 한국 간 영화 협력은 최근 몇 년 사이 뚜렷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판권 거래와 리메이크 중심의 초기 단계를 넘어, 기획에서 원작 개발 등 제작 단계 전반을 아우르는 ‘공동 창작’ 모델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콘텐츠 수출입을 넘어 양국이 서로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고, 공동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단계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난해 모홍진 영화감독이 연출한 베트남 영화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가 있다. 이 작품은 기존의 한국 원작을 리메이크한 형태가 아니라, 베트남의 가족과 노년 돌봄 문제를 소재로 한 오리지널 시나리오다. 주인공 ‘호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홀로 돌보며 겪는 갈등과 사랑을 통해 베트남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모 감독은 새로운 시선으로 베트남 정서를 그려낸 가운데 베트남 배우 뚜언쩐과 홍다오가 출연해 섬세한 감정선을 표현했다. 모 감독은 “익숙한 주제를 낯설게 풀어내 한국과 베트남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가 주목받는 이유는 양국 제작사가 투자부터 제작까지 역할을 거의 동등하게 나눴다는 점이다. 베트남 측의 판지아녓린 대표 프로듀서는 “과거에는 해외 자본과 노하우에 의존해 리메이크 형태로 영화를 제작했지만, 이제는 스토리와 제작 모두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단계로 발전했다”며 “영화에 베트남 고유의 색채가 살아있어야만 해외 관객에게도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흐름은 단편적 사례가 아니다. 최근 제작이 확정된 공포 스릴러 <개묘>(가제)는 한국 공포영화계의 ‘흥행 보증수표’라 불리는 김영민 프로듀서와 베트남 탕부 감독이 손을 잡았다. 이 작품은 베트남 전통의 ‘개묘(묘지 이장)’를 모티브로 삼아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독창적인 공포 세계관을 펼친다. 현지에서는 “이례적으로 베트남 전통 장례 문화를 대중 콘텐츠로 풀어낸 첫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프로듀서는 “이번 공동제작은 단순한 투자 배급 계약이 아니라, 베트남 로컬 스토리를 한국 기술력과 결합해 세계시장에 내놓겠다는 시도”라며 “양국이 함께 만들어야 글로벌 배급망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이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 산업이 아시아권에서 ‘공동 제작’ 허브로 자리잡은 영향이 크다고 본다. 한국은 이미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을 통해 콘텐츠 경쟁력을 입증했으며, 정책적으로도 제작·배급·기술까지 종합 지원 체계를 갖추고 있다. 베트남은 이를 벤치마킹해 자국 영화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해외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응오프엉란 베트남영화개발협회 회장은 “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영화산업 모델을 가진 나라”라며 “예술성과 상업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고, 산업 전반에 인재를 육성하는 생태계를 갖췄다”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과의 공동 제작 경험은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니라, 제작 단계부터 투자, 스토리 개발, 유통까지 아우르는 협업의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측 전문가들도 베트남의 성장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창립자인 김동호 BIFF 초대 집행위원장은 “베트남은 인구 구조, 소비력, 관광·문화 인프라를 고려할 때 동남아시아에서 독자적 영화시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며 “다낭이나 하노이 같은 도시들이 제작 허브로 성장하면, 한국과의 공동 제작은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5일까지 열린 다낭 아시아영화제(DANAFF) 2025는 이런 공동 제작 트렌드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교류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행사 기간 동안 강제규 감독은 베트남 신인 감독들을 대상으로 심화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제작 기술과 글로벌 스토리텔링 노하우를 공유했다.
이러한 교류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판 프로듀서는 “국제 공동 제작은 베트남 영화계가 기술과 자본을 배우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감을 가지는 과정”이라며 “베트남 국내 감독과 스태프들이 한국 측 파트너와 대등하게 기획부터 배급까지 관여하면서, 베트남 영화가 더 이상 주변 콘텐츠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베트남이 한국과 같은 영화산업의 ‘고도화’를 이루기 위해선 정부 차원의 장기적 전략과 인재 육성, 제작 인프라 확대가 필수라고 지적한다. ‘원소스 멀티유즈(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한 매체로 재가공해 활용하는 전략)’ 방식으로 2차·3차 콘텐츠 파생이 가능하도록 스토리 개발 단계부터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인력 양성과 기술 표준화 역시 공동 제작 성공을 위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베트남과 한국 영화계가 지금처럼 ‘공동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강점을 살려간다면, 단순한 수익 모델을 넘어 양국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관객에게는 다양한 스토리 경험을 제공하고, 양국 영화계에는 안정적 시장 확대와 인력 순환이라는 선순환을 안겨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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