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을 넘는 어젠다가 아니라, 더 뚜렷한 진영을 만들려는 경쟁
"지금 문제의식들은 다 가지고 있거든요. 상황이 이렇다는 것은 다 압니다. 현 정부에서도, 대통령도 문제는 다 알고 있지만, 이것을 개선하는 방법을, 대통령이 속한 정파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력하게 실천하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진영에 갇힌 사고일 수 있으며,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주체를 키우는 국가를 만드는 데는 부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두 개의 진영으로 딱 나뉘어 있단 말이죠. 지금까지 어느 한 진영이 다른 진영을 제압하려는 형식으로 몇 십년을 온 겁니다. 이 진영을 벗어나는 길은 이 두 진영이 서로를 모두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한 단계 높은 어젠다를 제시하여 두 진영을 모두 품고 갈 수 있을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더 높은 단계에서 두 진영을 모두 끌고갈 수 있는 것이 실력이어야 되는데, 이 진영에서 더 선명한 것이나 저 진영에서 더 선명한 것을 실력으로 보기 때문에 진영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 아직 실력이 부족한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이 다 문제의식이 아직 철저하지 않고, 익숙하게 가졌던 오래된 문제의식을 평생 소지하고 사는 것이지, 한 단계 더 높은 문제의식으로 무장하여 사회를 끌고가거나 상승시켜야 되겠다고 하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기능적인 사회에서는 '내로남불'을 교환할 뿐
"민주화 다음의 어젠다가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이걸 ‘선진화'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성과 삶의 진실성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본질적 가치랄까 높은 방향성을 갖지 못하면 인간은 기능적으로만 행동하게 됩니다.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그 임용이 삶의 기품이나 진실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하는 단계에 있는 거죠. 조국 후보만 특정하는 건 아닙니다만, 우리 사회가 중진국 함정에 갇혔다는 말은, 곧 전체적으로 모두 기능에 갇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실한 삶이 얼마나 가치있고 얼마나 실용적인지를 잊었거나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기능적인 싸움에서만 승리하는 것, 이것에 몰두하고 있는 거죠. 조국 후보의 일이 우리에게 슬픈 일인 것은 이것이 조국 후보에게만 해당되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조국 후보에게는 설마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수사 중인 사안이라 함부로 단정해서 말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조국 후보에게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기능을 쌓는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기능적인 사회에서는 상호간에 '내로남불'을 교환합니다."
-조국 후보 쪽에서는 "사퇴하라는 의견도 있지만, 찬성하는 의견도 있지 않으냐, 그러니 이것은 의견의 문제다"라고 보는 건가요.
"지금 우리 사회의 수준에서 볼 때 찬성하는 의견이나 반대하는 의견이 지적 부지런함을 통해서 나온 차별적 의견인가, 아니면 감성적·감각적 이질성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도 자세히 봐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국 후보가 법무장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저는 우리 사회 논쟁의 수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불미스런 일을 겪더라도 잘 반성하여 사회를 한 단계 상승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하니까요."
# 대학생들의 촛불, '성찰적 행동'으로 봐야 한다
-그분을 개혁 주체라고도 하고 개혁 입안자라고도 하는데, 그런 분이 드러낸 부도덕한 측면이랄까 그런 것을 보인 데 대해 국민이 놀라서 그리고 대학생들이 놀라서, 이건 아니지 않으냐 항의하는 그런 의미는 없습니까.
"있죠. 물론."
-그 의미는, 다만 감성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으로 뭔가 깊이있는 성찰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까.
"저는 성찰적 행동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이 이번이 처음 등장한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촛불이 왜 촛불로 완성되지 않는가. 촛불을 든 사람이 스스로 촛불이 아닌 채 촛불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과거에?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 촛불은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렇지만 촛불이 촛불 아닐 위험성은 항상 있었습니다. 왜 혁명은 완수되지 않는가.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혁명하려는 사람이 스스로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이 완수되지 않는다." 조국 수석은 촛불을 들었던 사람 아닙니까. 지금의 대학생들과 똑같이 촛불을 들었지 않습니까. 지금의 문제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스스로 촛불인 채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점이죠. 그래야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죠. 지금 촛불을 든 대학생들은 굉장히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 저항하는 정치적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지금 촛불을 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전에 촛불을 든 사람들과는 다른 자세로, 즉 자신에게 진실한 자세로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완결된 촛불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저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저항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진화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 촛불정부를 반대하는 촛불, 정부 스스로 돌이켜봐야
-이번 일로 이런 게 보이기도 하더군요.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부를 표방해 왔는데, 누군가 다른 촛불을 들어서 촛불정부의 무엇인가를 반대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딱 붙어 있었던 정부와 촛불이 나뉘게 되는 겁니다. 나눠지면서 '촛불'이 더 큰 개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지요. 촛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떤 것에 대해서 항의하고 반대하며 문제를 새롭게 다시 따져보자는 그런 제시의 툴이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대학생들의 촛불에 대해 정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반대를 해서 촛불을 들었듯이 지금 촛불을 드는 그들 또한 무엇인가 반대를 하고 있으니, 정부가 그 반대의 의미를 자신을 돌아보듯 성찰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게 지금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봐야 할지요.
"(정부가 그런 문제를 성찰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누군가 자신에 대해 반대를 하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숙고와 반성이 없이는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발전이 없죠."
-논문 등재나 펀드 투자 같은 문제들이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의 이면에서 나와서는 안될 것이었다는 비판이 줄기차게 제기됐고, 이런 점들이 국민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배신감을 안겨준 일에 대한 지적도 많았는데, 받아들이는 쪽에서 “오해가 있었다” “자세히 해명하면 오해가 다 풀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지금 이 문제는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으니까, 일단 기다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관계가 드러난 뒤에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인사 원칙, 대통령이 안 지키니 신뢰 무너졌다
-현재 검찰이 압수수색에 들어가고 청문회 개최 문제도 큰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인데, 검찰의 행위에 대해서도 국민들의 불신과 의심이 상당하고 청문회에 대해서도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국민들의 냉소적 시선과 ‘불신’이 갈수록 커지는데, 이에 대한 상식적인 해법은 없을까요. 우리가 정말 무엇을 해야 이런 것들이 바뀔 수 있는지 답답하고 궁금합니다.
"방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신이란 말. 사회가 건강하게 서 있으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상호간의 신뢰입니다. 정부와 국민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에 신뢰가 없으면 사회는 건강하게 설 수가 없습니다(無信不立·무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우리나라는 한 국가 속에서 두 쪽으로 쪼개져 있습니다. 나라가 쪼개져 있는 상태에서 몇 십년을 지내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지도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겁니다. 이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통일이 되겠습니까.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려면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중국의 진(秦)나라가 변법(變法), 즉 혁신에 성공해서 국력이 강해졌죠. 그래서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원래 진나라는 힘이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상앙(商鞅·BC ? ~338)이라는 재상이 나타나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위에서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기 때문이었죠. 지금 한국의 상황과 비슷했죠. 그래서 상앙이 수도의 남문에 말뚝 하나를 박아놓았습니다. 이 말뚝을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겐 거금을 주겠다고 공표합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도 안 믿었죠. 그런데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것을 북문으로 옮겼어요. 옮기니까 나라에서 약속대로 돈을 줬어요. 그랬더니 아, 나라의 말을 믿을 수가 있구나. 이렇게 신뢰를 회복해서 혁신에 성공할 수 있었고 천하통일까지 이룬 겁니다. 우리나라도 이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제시한 인사원칙만 제대로 지켰어도 우리나라는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무엇보다 '말'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것도 눈앞의 기능적인 선택에 밀려버린 거죠.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성을 회복하려면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 권력집단에서부터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신뢰가 회복되지 않고 가는 길은 다 단단하지 못합니다."
# 자기 위엄을 못 지킬 때, 관용을 베푸는 건 비굴함
-외교문제도 많이 거론됩니다. 북한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졌고, 일본과도 갈등이 심각해져 있으며, 미국 또한 상당한 이견과 불화를 지니게 된 상황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주변 국가들의 상황변화에서 온 것입니까, 아니면 이 정부의 외교적 인식이나 역량의 문제에서 생기는 것일까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한한테 종속적인 태도를 보이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조롱까지 당하면서 ‘무한관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죠. 무슨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용도 관용을 베푸는 사람의 위엄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기위엄이 지켜질 때만 가능한 거죠. 자기위엄이 지켜지지 않을 때 관용을 하는 것은 비굴함입니다. 자기위엄을 잘 지켜야 합니다.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외교는 적을 줄이고 친구를 늘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념이 아니라 실리를 원칙으로 하면 되겠지요."
-외교적 고립상황이 최근 1~2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가시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게 선명한 풍경으로 다가오게 됐죠. 국민들에게 ‘외교적으로 고립됐구나’ 하는 불안감이 들도록 말입니다.
"외교를 직접 하시는 분들이 더 깊고 큰 생각을 가지고 있겠죠."
# 표독스런 말도, 진영 논리 속에선 윤리적이라고 정당화
-그 더 큰 생각을 국민이 어느 정도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요. 불안을 줄여주려면 상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대북, 대일본 문제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소통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적으로 더욱 만연해진 증오, 혐오 감정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회가 더 잘 살게 되었는데, 감정들이 거칠어지고 불안과 불만이 커지는 까닭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가 보통 배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기품과 존엄을 허물어뜨리지 않고 잘 유지하기 위한 행동의 한 유형입니다. 내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내 품위를 지키고 손상시키지 않기 위한 행위가 배려입니다. 매너도 출발은 타인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의 기품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 매너로 나타나는 거죠. 혐오 혹은 증오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거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자기 삶의 기품과 존엄에 대해 숙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독립적이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집단의식을 내 독립적인 의식으로 착각하는 것이죠. 집단의식을 형성하는 '우리' 속에 갇혀 있기에 내 존엄과 내 기품은 여기서 존중되지 않아요. 집단에 갇힌 감정은 매우 공격적입니다. 나 스스로에게서 생겨난 감정은 나를 보호하는 것을 우선하기에 함부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죠. 진영의 논리에 갇혀 있으면 사람이 굉장히 표독스러워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언어는 이보다 더 표독스러운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납습니다. 진영에 갇힌 사람들은 나의 모든 윤리적 책임을 다 진영에다 두고 있기 때문에 나의 윤리적 책임성이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 표독스러운 언어를 사용해도 이것이 진영을 위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표독스러움이 오히려 윤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가치의 전도(顚倒)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예요. 나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우리에 갇혀 있고 진영에 갇혀 있는 한 그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어떤 표독스러운 말이나 적대적인 행위도 윤리적인 죄책감을 발생시키지 않는 거죠. 일상을 진영에 갇혀서 산다는 말은 ‘독립적 주체로서의 나를 포기한다’와 같습니다."
대담 = 이상국 논설실장
# 최진석교수 : 베이징대 도가철학 박사
2019.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출범
1996~1998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2003~2005 캐나다 토론토대 동아시아학과 방문교수
1998~ 서강대 철학과 교수
<저서>
2017. '탁월한 사유의 시선'(21세기북스)
2016.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
2015.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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