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미나리' 맑은 여운, 물결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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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희 기자
입력 2021-03-0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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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개봉하는 영화 '미나리'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영화 시사회를 앞두고 관계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앓는 소리를 한다. 기대를 낮추려는 거다. 놀랍게 그 '앓는 소리'는 효과가 있다. 묘한 심리다. 마음을 비우면 예상치 못한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되고, 기대가 크면 실망스러운 점들을 찾아내게 된다.

물론 마음을 비우고 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레전드' 감독의 복귀작이라거나, 유명 배우와 제작진으로 라인업을 꾸렸거나, 해외 유수 영화제를 휩쓴 작품들이 대개 그렇다. 시사회 전부터 떠들썩한 분위기를 지울 수 없다.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가 그랬다. 제36회 선댄스영화제를 시작으로 제78회 골든글로브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영화협회와 시상식에서 75관왕 156개 노미네이트 쾌거를 이루며 순식간에 전 세계 영화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매일 아침, '미나리' 수상 소식을 업데이트하는 게 일과가 되었고, 작품상과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상 수상 소식에도 놀라워하지 않게 됐다. 마치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행보였다.

그런 이유로 영화 '미나리'에 관한 기대감을 지우기란 어려웠다. 영화 '미나리', 그 자체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화려한 수상 이력을 지우려 애썼지만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소식에 궁금증과 더불어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아마 많은 취재진과 예비 관객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리고 지난달 18일 영화 '미나리' 언론 시사회가 진행됐다. 시사회 당일, 어찌나 많은 취재진이 몰렸는지 영화 상영이 15분 정도 지연됐다. 국내서도 영화 '미나리'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막상 영화를 보고는 얼떨떨했다. 갑자기 확 와닿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아닌, 영화 속 내용의 슴슴하니 담백한 맛 때문이었다. 배우 윤여정이 국내 취재진과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실망하실까 봐 걱정스럽고 떨린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맛"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워낙 '빨간 맛'에 길든 탓에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그 담백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며 생각이 바뀌었다. 담백하고 순수한 맛이 자꾸만 떠올랐다. 해독과 정화하는 효능이 탁월하다는 미나리처럼 영화도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힘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운이 물결치듯 밀려왔다. 누군지 모를 이들이 어디서든 버티며 잘 살아가기를 바랐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데이빗(앨런 김)과 앤(노엘 케이트 조).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성별을 감별, 생계를 유지하던 제이콥(스티븐 연 분)과 모니카(한예리 분)는 외진 아칸소로 이주한다. 제이콥은 딸 앤(노엘 케이트 조 분)과 아들 데이빗(앨런 김 분)에게 아버지로서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오랜 꿈이었던 농장 일을 시작한다. 모니카는 낡은 컨테이너며, 농장 일에 몰두하는 제이콥이 못마땅하지만 참고 인내하기로 한다. 하지만 부부가 해야 할 일이 늘자 아직 어린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 분)가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가방 가득 고춧가루, 멸치, 한약, 미나리씨를 담아온 할머니 순자는 여느 '그랜마'처럼 쿠키를 굽거나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고 막내아들 데이빗은 그런 할머니가 영 못마땅하다. 그러나 순자 역시 보통의 '그랜마'였다. 그는 아이들의 못된 장난까지 사랑으로 품고 상처까지 어루만진다. 할머니가 낯설기만 하던 아이들도 점차 순자와 가까워진다.

영화 '미나리'는 '문유랑가보'로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후보에 오른 정이삭 감독의 네 번째 장편이다. 미국계 한국인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생활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정 감독은 극 중 데이빗과 또래인 딸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던 중,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영화 곳곳에서 그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미나리'를 두고,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나 실제 가족 이야기를 찍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며 "영화가 더욱 좋았던 건 노스탤지어에 젖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봉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감상에 젖거나 도취하는 법 없이 거리를 두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 '미나리'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기억의 조각을 풀어가다 보면 어느 한계에 부딪힐 수 있겠지만 이를 경계했기 때문에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완성했다.

미국 이민만이 살길이라 여겼던 아버지 제이콥과 어머니 모니카, 투박하고 거친 탓에 본의 아니게 가족의 평화를 깨는 할머니 순자, 일찍이 책임감과 부담감을 안게 된 첫째 딸 앤, 할머니에게 심술궂은 행동을 하는 막내아들 데이빗까지. 가족들은 여러 이유로 충돌하고 상처를 주고받지만, 그럼에도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를 보듬고 응원하며 지키고자 애쓴다. 한인 가정, 이민자라는 특수성 속에서도 전 세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할머니 순자(윤여정 분·왼쪽)와 아이들. [사진=영화 '미나리' 스틸컷]


영화의 주인공이자 제작자로 활약한 배우 스티븐 연도 이를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미나리'를 찍으며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말처럼 관객들은 영화 속 가족 구성원을 들여다보며 자신 혹은 가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어떤 강요나 억지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정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 미나리가 그러하듯, 영화도 질긴 생명력으로 단단하게 메시지를 끌고 가며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물한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이미 많은 영화 시상식을 통해 증명된 바. 제이콥 역의 스티븐 연과 모니카 역의 한예리, 순자 역의 윤여정, 딸 앤 역의 노엘 케이트 조, 데이빗 역의 앨런 김의 연기는 영화가 더욱 깊은 맛을 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상영관을 나선 뒤에도 순자와 데이빗의 얼굴, 그들과 함께한 순간들이 좀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집살이를 하며 함께 먹고, 자고 작품에 관해 연구했던 배우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이들의 호흡은 영화 곳곳에서 빛난다.

상영관을 나서며 괜히 가족들에게 전화를 한 통씩 돌려보았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오늘(3일) 개봉. 러닝타임은 115분이며 관람 등급은 12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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