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2019) 이후 처음이네요. 영화가 상영하던 도중 코로나19 범유행이 시작되었고 오랜 시간 관객과 만나지 못했어요. 사실 촬영은 쉼 없이 했지만, 영화가 개봉하지 못하는 터라 관객들과 만나거나 소통하기 힘들었죠. 오랜만에 '비상선언'으로 관객과 만나고 시사회나 무대인사를 진행하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늘 하던 일이었는데…. '참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었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영화 '비상선언'은 테러 위기에 놓인 비행기와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재난 앞에 선 사람들의 감정과 드라마를 그렸다. 지난해 제74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공식 초청되었고 현지 관객들에게 10여 분간 기립박수를 받으며 국내 관객들의 기대감을 키웠다. 애초 2021년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수차례나 개봉을 미뤘다.
"상황을 지켜보며 개봉을 미뤄야 했던 한국 영화들이 많았죠. 다른 방법으로 관객과 만나는 영화들도 있었고요. 언제까지 개봉을 미룰 수는 없었고 적절한 시기에 관객들과 만났다고 생각해요. 의도적인 건 아니었지만 코로나19 범유행을 지나며 '비상선언'의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기도 하고요."
이병헌은 극 중 딸아이의 치료를 위해 비행기에 오른 탑승객 '재혁' 역을 맡았다. 비행 공포증을 겪고 있지만 아토피로 고생 중인 딸을 위해 하와이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탑승 전부터 자신의 주변을 꺼림칙하게 맴돌던 의문의 남성을 보며 불안함을 느낀다. 그가 자신을 따라 비행기에 탔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 빠지지만, 재난 상황에 닥친 혼란의 비행기 안에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재혁'은 승객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딸아이를 가진 평범한 아버지'이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보다 '재혁'이 위기의 상황 속 당황스러움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는 '승객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작은 일에도 불안을 느끼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상황을 탐색하는 모습을 통해 승객들의 마음을 대변하려고 했죠."
"저도 아버지로서 직접 경험했던 일들이 있으니까 연기할 때 어떤 확신이나 자신감이 생기죠. 다만 저는 아들을 둔 아버지라서 조금 연구가 필요하긴 했어요. 아들을 둔 아버지와 딸을 둔 아버지는 조금 다르거든요. 아이를 대하는 태도나 놀아주는 방식도 크게 다르죠. 그래서 주변에 딸을 가진 아버지들을 관찰하곤 했어요."
딸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를 칭찬하던 중 "재미있는 일이 있다"고 말문을 연 그는 "'백두산'(2019)의 딸 김시아와 '비상선언'의 딸 김보민이 자매"라는 사실도 알렸다.
"'백두산'에서 딸 역할을 맡은 친구(김시아 분)와 '비상선언'의 '수민'(김보민 분)이는 자매예요. 제가 두 자매의 아버지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둘 다 참 좋은 배우예요. 어떻게 그 나이에 저런 연기와 표현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항상 놀라곤 했어요. 좋은 배우가 될 친구들이에요."
이병헌은 언론 시사회 당시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고 고백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해당 경험으로 극 중 '재혁'이 겪는 고통과 공포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기보다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겠구나 생각했던 거였죠. '재혁'의 캐릭터를 만들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한재림 감독님과 가장 많이 이야기한 부분이에요. '재혁'이 지금 어떤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 몸의 증상이 어떤지, 호흡은 또 어떤지…. 그로 인한 표정에 관해서도 계속 이야기했죠. 영화 속에서는 공황장애에 관한 표현은 슬쩍 나오지만, 그 증세를 아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대단한 촬영이었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비행기 본체와 부품을 공수해 와야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거든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계속해서 지연되기도 했고요. 장비 기사들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오지 못해서 솔직히 불안한 마음도 있었어요. 안전성이 검증되었다고 하지만 촬영하다가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공포심이 연기할 때는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처음 며칠은 비행기를 돌릴 때마다(비행기 세트를 360도 회전되는 짐벌로 회전하면서 촬영했다) 긴장했는데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여유롭게 굴었어요. 어려움도 많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비상선언'의 시그니처 장면이 되었구나 싶고요."
어렵고 힘든 촬영이었지만 송강호, 전도연 등 명배우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힘이 났다고. 그는 "좋은 배우들과 함께할 때면 자신감이 들곤 한다"고 말했다.
"어떤 작품을 할 때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잖아요. 시나리오보다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좋은 이야기지만 잘못된 길을 따라가다가 (관객에게) 사랑받지 못할 때도 있고요. 그런데도 좋은 캐스트와 함께 호흡할 때면 자신감이 생긴다고 할까요? 의지할 수 있고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더 커지니까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죠."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함께 힘든 시간을 보냈잖아요. 이 영화가 묘하게 코로나19 범유행과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 세계 모두에게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까?' '깊이 이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코로나19 범유행 시기를 겪으면서 한 번쯤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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