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와 흑산도는 몇 번 가봤지만 가거도(可居島)는 처음이다.가거도의 한문 이름을 풀면 '살만한 섬'이라는 뜻이다. 작자 미상이지만 섬에서 한 사나흘 살아보면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2시간 30분,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3시간 30분 걸린다. 목포~가거도는 풍랑이 심한 날이면 뱃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속이 뒤틀리는 길고 긴 시간이다. 멀미를 안 하려고 기상예보에 바람이 없는 날을 골라 겨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가거도를 한 시간가량 남겨두고 여객선이 만재도에 들렀다. 요즘 방송을 타고 알려진 만재도는 직항로가 생기기 전까진 비금도 도초도 흑산도 다물도 상태도 하태도를 거쳐 6시간이나 걸리던 섬이다. 전남 신안군에선 가장 먼 뱃길. 만재도에서 촬영한 ‘삼시 세끼’가 방송을 타면서 직항로가 개설돼 운항시간이 2시간 20분으로 줄어들었다. 여객선이 부두에 바로 닿는 접안시설이 만들어져 종선으로 갈아타고 부두에 오르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 만재도에서 바다낚시꾼 10여 명을 내려준 배는 가거도항에 정시에 닿았다.
국토의 서남단에 자리한 가거도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섬이다. 가거도의 주봉인 독실산은 높이가 639m로 서해에서 가장 높다. 서해를 건너 한국과 동남아를 오가는 철새들의 정거장이다. 윤무부 박사 등 철새 연구자들이 가거도를 자주 찾는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한반도의 영해(領海)가 시작하는 기점(基點) 중의 한 곳. 한국에는 영해의 기준이 되는 섬이 23개가 있는데 이 중 10개가 유인도. 이 섬들을 이은 기선(基線)에서 영해 12해리가 시작한다.
‘송아지 열매’ 섬 내 독실산 이름의 유래
섬에는 후박나무와 함께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붉가시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아열대식물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가거도 산림의 80%가 후박나무. 전국 한약상에서 유통되는 후박나무 껍질의 70~80%가 가거도 산이다. 후박나무는 비둘기가 열매를 먹고 똥을 싸면 거기서 싹이 터 자연적으로 퍼져나간다. 가거도 주민들은 밭에도 돈이 되는 후박나무를 심었다. 껍질은 한약재로 팔고 나무는 땔감으로 썼다. 지금은 한약이 잘 팔리지 않는 데다 값싼 중국산 한약재가 밀고 들어와 시세가 떨어졌다. 임씨는 후박나무 껍질의 시장 가격이 채취하는 인건비에도 못 미친다고 말했다. 후박나무 잎은 짙은 청록색에 광택이 나는 윤채(潤彩)가 있다. 그는 오늘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해서 후박나무 잎을 콩기름으로 닦아놓았다고 우스개를 했다
임명옥(任明玉)이라는 이름을 듣고 “여자 이름인데요” 했더니 “여자 이름이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동네 이장이 흑산면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면서 오류가 생겼다. 임씨 할아버지가 이장에게 적어준 종이쪽지에는 빛날 욱(旭)이 들어간 명욱(明旭)이었다. 이장은 분명히 ‘임명욱’이라고 말했는데 면서기가 호적에 구슬 옥(玉)자를 적어넣었다. 면서기가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 가거도 이장이 흑산도까지 가는 사이에 쪽지를 잊어버리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것인지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임씨는 “원래대로 명욱이 됐더라면 내 인생이 더 빛났을 터인데…”라며 웃었다. 그는 젊어서 토건업을 하면서 하청을 받아 가거도 방파제 축조작업에 참여했다. 가거도 항에서 섬등반도 가는 도로도 자신의 회사가 닦았다고 말했다.
“어선 한 척이 하루 1억 번다”… 조기철엔 국제도시로
가거도는 국제교역선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통일신라 시대부터 중국 무역의 중간 기항지로 활용됐다. 가거도에서 새벽에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도 있으나 중국과의 최단거리가 385㎞니 턱없는 과장법이다. 해무(海霧)가 없는 날이면 가거도에서 제주도와 추자도가 바라다 보인다. 겨울 조기잡이 철에 바람이 불면 어선 수백 척이 피항(避港)한다. 조기 철에는 가거도항이 국제도시로 바뀐다. 온갖 인종들이 작은 방에서 네댓 명씩 함께 묵는다. 어선들은 조기를 따라다닌다. 10월부터 어선들이 몰려와야 하는데 조기가 제주도 쪽으로 가버렸는지 이번 겨울에는 여관방이 많이 비었다.
가거도 방파제는 1979년부터 2008년까지 30년간 공사를 벌여 완공했으나 태풍에 두 번 강타를 당해 심하게 훼손됐다. 초대형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슈퍼 방파제를 만들고 있으나 매년 태풍에 두들겨 맞으면서 10년째 공사 계속 중이다. 순간 최대 풍속 50m의 태풍은 2019년 가거도항의 계단식 축대를 무너뜨리고 부두 일부를 파괴했다.
64t짜리 테트라포트(가지가 네 개 달린 마름쇠 모양 콘크리트 구조물)가 초강력 태풍을 맞고 방파제에서 파출소 앞까지 밀려온 적도 있다. 태풍은 육지에 상륙하면 서서히 힘을 잃지만 가거도 같은 바다 한가운데서는 더 힘이 붙는다. 방파제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자연의 힘을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 임씨는 “초강력 태풍 덕에 토건업자와 인부들도 국가 예산으로 먹고사는 것 아니냐”고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초강력 태풍에 무력한 슈퍼 방파제
가거도 주민은 2002년 기준 404명이지만 주민등록만 섬에 두고 목포 등에 나가 사는 사람이 많아 실제 주민은 200명 정도. 흑산면 가거도리에는 마을이 세 개 있다. 1구는 가거도 항구가 있는 마을로 제일 크다. 2구는 섬등반도가 있는 향리, 3구는 바다낚시가 잘되는 대풍리다. 향리와 대풍리에는 빈집들이 많다. 그나마 대풍리에는 바다낚시꾼들이 별장으로 쓰려고 집을 사두어 향리처럼 을씨년스러운 폐가는 없다. 가거도 바다에서 잡히는 어종은 감성돔 노래미 참돔 농어 볼락 우럭 돌돔…. 학꽁치는 지천으로 흔하다.
1층은 식당이고 2, 3층은 여관인 동해장·식당에 숙소를 정했다. 학꽁치회와 학꽁치 구이가 끼니마다 번갈아 나왔다. 매끼 불볼락국이 올라왔다. 불볼락은 살을 뜯어 먹는 맛이 일품. 테이블에 가득한 반찬이 12가지인데 다 먹을 만했다.
목포항에서 흑산도 홍도 가거도를 오가는 남해고속의 쾌속선들은 코로나로 2년 동안 묶여 있다시피 했다가 올여름부터 운항을 재개했다. 쾌속선 8대를 보유한 남해고속 나광수 회장은 “가거도에 배가 다녀올 때마다 유류비가 700만원가량 드는데 350명 정원에 손님이 드문드문 앉았으니 배를 안 띄우는 게 나았다”고 말했다. 80명 직원을 한 명도 감원하지 않고 2년을 버텼는데 이번 여름에 손님이 반짝하는 듯하더니 또 겨울이 왔단다. 겨울에는 주말에 흑산도 홍도 항로만 손님이 찬다.
가거도는 육지에서 뱃길이 멀어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됐다. 조류와 식생(植生)은 아열대 특성이 두드러진다. 가거도에서는 등산로를 별도로 찾을 필요가 없다. 차들이 어쩌다 한대씩 다니니 차도가 곧 등산로다. 가거도에는 7구간의 공식 등산로가 있는데 내·외지인들의 평가를 모아보면 동개해수욕장-달뜬목-해뜰목-삿갓재의 1구간 경치가 으뜸. 달뜬목에서 바라다본 망망대해와 해변 풍경을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