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처음에 재계는 나름대로 큰 기대를 가졌다. 친기업 성향인 보수 정부인 데다 대통령이 기업을 잘 아는 CEO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생활 밀접 52개 품목에 대한 이른바 ‘MB 물가’ 관리에 들어가자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더구나 당시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자신이 공인회계사임을 앞세우고 기름값 원가와 유통구조를 샅샅이 뜯어보겠다며 유가 인하를 압박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더한다”는 볼멘소리가 재계에서 터져나왔다.
늘 그렇듯 고개를 드는 물가는 ‘큰 정부’를 소환한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자유와 규제 완화의 깃발을 들었지만 민생 전반을 옥죄는 물가 앞에선 국민의 ‘주머니 사정’을 배려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국민의 지갑은 얇아져 가는데 올라가는 금리에 무임 승차해 쉽게 이익을 늘린 은행의 ‘눈치 없는’ 성과급 잔치. 여기에 ‘은행은 공공재적 시스템!’이라며 경고 카드를 들고나온 정부의 공세. 이 상황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은행이 자초한 일이며 정부로서도 팔짱 끼고 방치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물가의 고삐를 잡으려는 행정 조치의 과녁에는 통신사, 주류업체, 정유업계 등이 포함됐다.
시장경제에 대한 이 같은 정부의 개입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유를 얘기해 놓고 정부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 논리다. 시장은 불가침(?)의 성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한번 따져보자.
어찌 됐건 국부론에만 머물면 ‘시장은 만능’이라는 생각에 갇히게 된다. 논의의 지평이 바뀌는 실마리는 스미스의 다른 저작에서 발견된다. 1776년에 나온 국부론보다 17년 전인 1759년에 쓰인 ‘도덕감정론’이 그 주인공이다. 이 책에서 스미스는 이기심보다는 연민, 자애, 동정심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사심을 억제하고 남을 위한 자애심은 방임(放任)하는 것이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덕의 완미함은 우리 자신의 번영이 전체의 번영과 일치하거나 혹은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개인보다 전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기심의 자제가 필요하며 이런 맥락에서 국가는 사회의 행복과 불행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회단체라는 게 스미스의 또 다른 주장이다. 결국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의 긴장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시선이 중요함을 말해준다. 시장이 절대적 명제는 아니며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는 국가의 역할이 같이 가야 사회와 경제에 무게중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조의 편향성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국가나 시장의 과잉이 가시화할 때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대표적 인물은 시장주의의 본산인 시카고학파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의 논지는 그저 시장 절대주의와 기업 자유로의 직진이다. 한마디로 시장이 알아서 잘하니 정부는 최대한 뒤로 빠져 있으라는 얘기다. 그는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이를 해석하는 심판으로 역할을 줄일 것을 요구한다. 정부 재정에 대해서는 “경기 변동을 일으키는 다른 힘들을 상쇄하는 균형 바퀴가 되기는커녕 그 자체로서 경기 교란과 불안정의 주된 원천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시각이다 보니 기업 경영에 대해서도 ‘자유’를 주장한다. 1970년에 나온 ‘프리드먼 독트린’에서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늘리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목적을 가진 기업에 고용 창출, 오염 방지 등 활동을 하라고 하는 것은 사회주의라며 ‘색깔론’을 덧입히기도 한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너무 나간 것이다.
프리드먼 독트린은 이후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거치면서 시장 절대우위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로 이어진다. 정부의 영역은 크게 좁혀지고 규제 완화, 민영화, 무역 개방 등이 확산된다. 신자유주의는 국제 무역의 확대와 개도국의 경제 개발 등 적지 않은 열매를 맺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양극화 심화와 환경 훼손 등 큰 부작용을 초래했고, 2008년 금융위기 와중에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사실상 좌초했다. 신자유주의의 퇴조는 동전의 양면이었던 프리드먼 독트린의 쇠락을 뜻한다. 실제로 이를 반영해 프리드먼 후예들은 노선을 일부 수정했다. 시카고대학의 스티글러 센터는 2020년 프리드먼 독트린이 나온 지 50주년을 기념하는 취지로 발간한 논문집에서 프리드먼이 부정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했다. 이 논문집에서 루이스 진갈레스 교수는 프리드먼의 견해는 완전경쟁시장에서만 유효하다며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독과점 기업이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이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거대 기업들은 이익이 아니라 사회 후생(厚生)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외적 요구를 인정한 셈이다. 발상의 커다란 전환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학교 교수는 최근 저서 ‘자유주의와 그 불만’에서 경제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질해 기괴한 불평등의 모습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특히 “정부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적대감은 명백히 비합리적”이라며 “국가는 공공재를 공급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를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의 ‘적’으로 악마화했던 시대와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 후쿠야마의 제언이다. 정부는 특히 경제에 걸림돌이 아니라 촉매제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리스크가 너무 커 민간기업이 뛰어들지 못하는 초기 기술 투자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이를 성공시킨 다음 이 기술을 민간으로 넘겨주는 ‘기업가형 정부’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폰의 탄생을 가져온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 등 핵심 기술이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개발된 게 대표적 사례다.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정부는 흔히 여겨지는 것보다 가치 창조에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만 정부의 가치 창조 역량은 매우 심하게 저평가받고 있다”고 지적한다.(‘가치의 모든 것’)
지금까지의 논의는 최근 이뤄진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중요한 사실은 과잉 개입도 문제지만 시장을 교정하는 정책 자체를 시장의 자유를 훼손하는 ‘악’으로 보는 사고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어른거리는 사고 구조이다. 정책이 국민 다수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공동선(善)을 지향하거나 경제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위기 국면에서 서민 가계의 안정을 위해 물가를 억제하고 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견제하고 나선 정책은 적절성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다만 개입이 과도한지를 살피는 사회적 감시는 물론 정부의 절제와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곱씹어볼 만한 의견을 들려준다. 밀은 먼저 정부가 개입해서 안 되는 두 가지 경우를 언급한다. 정부보다 개인이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때와 이미 비대해진 정부 권력을 더 강화하려고 할 때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목적이 정부의 권력 확대인지, 부정적 영향의 차단인지에 따라 시장 개입이 정당한지가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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