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의 사연을 표정으로 한순간 다 표현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 이게 진짜 영화구나'라고 생각했죠."
엄태화 감독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찍으며 배우 이병헌의 연기에 짜릿함을 느꼈다. 캐릭터의 사연을 표정으로 표현하는 걸 보며 "이게 진짜 영화구나" 감탄하기까지 했다.
엄 감독의 말이 허투루 느껴지지 않는 건 그가 '이병헌'이기 때문이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이를 증명한다. 영화 공개 직후 관객들의 반응도 그랬다. "이병헌이 이병헌 했다"라고.
"영화 공개 후 주변에서 '좋았다'고 해주고 반응도 좋으니까 기분 좋죠. '영탁'처럼 극단적인 감정을 연기해야 할 때는 특히 걱정이 많거든요. '내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 주실까?' '이 정서에 동화될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이 있죠. 다행히 영화 공개 뒤 많은 분이 공감해 주시고 동화되는 거 같아서 안심됐어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극 중 이병헌은 황궁아파트 입주민 대표 '영탁' 역을 맡았다. 망설임 없이 화염에 휩싸인 집에 들어가 단숨에 불길을 진압하는 인상적인 모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투철한 희생정신을 인정받아 새로운 주민 대표로 선출된 그는 주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외부인을 방출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활약을 펼치며 모두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소속사 대표님께 영화 줄거리를 간략하게 들었는데 단박에 흥미를 느꼈어요. '와! 엄청 재밌다! 시나리오 한번 보자'고 했죠. 시나리오 자체가 정말 훌륭했어요. 만화적이지만 여러 인간 군상을 담아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참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병헌은 섬세한 심리 묘사로 '영탁'이라는 극단적 인물을 관객에게 동화 시켰다. 이병헌의 장기기도 하다.
"리더 한번 해본 적 없는 루저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 앞에 나서 본 적도 없어서 입주민 대표가 되었을 때도 어리숙하게 굴죠. 주변머리가 없을 거로 생각했어요. 기본적으로 상황 때문에 나서지 못하기도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는 '영탁'을 '절대 악'처럼 여기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단계별로 감정을 쌓아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영탁'은 경악스러운 인물이죠. 상식적이지는 않으니까. 다만 '저런 사람이 주변에도 있을 법하다'고 여겼어요. 내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몇 명 정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요. 상식적 범위 안에 있는 사람이지만 극단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이들도 있고요. '영탁'의 기본 심리는 억울함이에요. 영화 말미 대사처럼 '영탁'은 그 집을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완벽에 가까운 이병헌의 연기는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그는 작품과 캐릭터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군데군데 디테일들을 심어놓곤 한다. 이병헌은 "감독들과 오랜 대화 끝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저 대본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죠. '살아있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 감독님들과 대화를 많이 해요. 엄태화 감독님과도 그랬죠. 워낙 말이 없는 분이라서 대화를 통해 끌어내지 않으면 아무 디렉션 없이 연기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저는 연기할 때 이것저것 아이디어 내는 걸 좋아하거든요. 물론 그걸 좋아하는 감독님, 싫어하는 감독님도 계시죠. 엄 감독님은 좋아하는 편이셨어요."
엄태화 감독을 만족하게 한 애드리브 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는 '영탁'이 입주민 대표로 선정되는 장면을 언급하며 "감독님께서도 만족했던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주민 장부에 이름을 쓸 때 '미음(ㅁ)'을 먼저 쓰고 머뭇거려요. 그의 진짜 이름은 '모세범'이니까요. 그는 '김영탁'으로 살기로 했고 고민 끝에 '김'이라고 고쳐 쓰죠. 감독님께서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저도 기분 좋았죠."
'영탁'의 외모에 대해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권력을 얻어가면서부터 헤어스타일도 미세하게 변화하는 디테일을 심어놓은 것이다.
"머리숱이 많아서 옆으로 자라는 스타일로 가자고 했어요. '엠(M)'자로 살짝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요. 아이디어를 내고 캐릭터의 외형을 다져나가면서 '아, 팬은 좀 떨어져 나가겠다'고 생각했죠. 하하하. 관객분들이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영탁'이 권력을 쥐고 변화하면서 헤어스타일도 미묘하게 달라져요. 각도가 살짝 바뀐 거죠. 권력의 정점에는 머리카락이 마구 뻗쳐있어요."
이병헌의 연기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아주 단단하다. '믿고 보는 배우'의 대표이고 '연기 신'으로도 불리는 그이지만 "연기 할 때마다 불안에 떨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연기 경력이 30년을 훌쩍 넘긴 배우의 '불안'이라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 보통 사람보다 보편적 감정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훨씬 깊이 빠져들 수 있어요. 그건 아마 저뿐만 아니라 보통의 배우들이라면 다 그럴 거예요. 하지만 이조차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떨 때는 내 감정이 과잉이거나, 모자랄 때도 있겠죠. 그래서 불안감이 늘 함께해요."
그렇다면 불안감을 떨쳐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단박에 "믿음"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믿고, 동료들을 믿으며, 관객들을 믿는다는 설명이었다.
"내 감정선이 보편적이었구나라고 생각이 될 때가 있어요. 그 믿음으로 가는 거죠. 이 이야기 안에서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 내게도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 믿음을 감독님, 스태프들에게 확인받으면 그게 곧 자신감이 되는 거죠. 계속해서 되놰요. '내가 맞아, 괜찮을 거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다음 캐릭터도 연기할 수 있고요. 불안의 감정만 지속된다면 캐릭터를 온전히 구현할 수 없으니까요. 불안감을 떨쳐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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