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아물어도 흔적은 남는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지만 마음이 성숙할지라도 몸은 사실 아픈 만큼 쇠약해진다. 2022~2023년에 찾아온 고물가와 고금리가 해결되지 못한 채 2024년을 앞에 두고 있다. 고물가와 고금리의 상처는 장기 침체라는 흔적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장기 침체에 진입하나?
한 나라의 경제가 휘청일 만큼 충격이 있고 난 뒤에는 경제 체질 자체가 바뀌는 듯하다. 실제 어떠한 대내외적 충격이 있을 때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 경제위기의 충격이 가장 대표적이고 그 상처가 있고 난 뒤의 경제 여건에 흔적처럼 잠재성장률이 뚝뚝 떨어져 왔다. 저출산, 인구 감소, 고령화라는 인구구조 변화는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리라는 희망을 제약하고 있다.
장기 침체 피할 돌파구는 무엇인가?
장기 침체 진입이 피할 수 없는 여건이라면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일 것이다.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나라엔 미래가 없다. 산업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교육과 R&D를 집중해야 하는 절실한 순간이다.
일본은 변화에 대응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은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중대한 이유 중 하나다. 과거 일본이 카메라와 필름 시장을 독식하듯 장악했던 적이 있다.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패러다임이 변화할 때 삼성전자를 비롯한 IT기업들에 시장의 반을 내주었다. 디지털카메라마저도 사라지고 카메라 기능이 스마트폰에 탑재되면서 일본이 장악했던 카메라와 필름 시장은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다. 카메라와 필름에서 디지털카메라로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산업 패러다임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는데 일본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독일도 변화에 대응하지 않았다.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 군림하다시피 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온 독일은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의 시대적 전환에 대응이 부족했다. 독일이 내연기관차 시장에서는 군림했지만 전기차 시장에서는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2022년 기준으로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미국 테슬라와 중국 자동차 기업들에 자리를 내주었다. 1위는 테슬라(16.4%), 2위는 BYD(11.5%), 3위는 상하이차(11.2%)다. 폭스바겐은 4위로 전기차 시장을 7.2% 점유하고 있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겪었다고, 독일이 침체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한국도 그 길을 따라 나설 이유는 없다.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한국이 가진 경쟁력을 생각해야 할 때다. 모든 영역에서 잘할 수는 없다. 이미 모든 영역에서 잘할 만한 나라도 아니다. 한국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할 일을 고민해야 한다.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인도, 중국, 미국처럼 인구가 많아서 노동력이 풍부하거나 시장이 크지도 않지 않은가? 그마저 그 인구는 줄고 있지 않은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호주처럼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다. 원자재나 소재 공급을 차단하면 경제가 심장마비 걸리듯 멈춰 선다. 유일한 강점은 기술력이다. 기술력이 1위가 되었든, 10위가 되었든 어쨌든 기술력을 높이는 것만이 한국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다. 기술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과 기초과학과 기술 기반의 산업을 육성하는 R&D는 한국의 미래를 두고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래 없는 예산안
다소 긴축적으로 예산(안)을 편성한 부분엔 공감과 응원을 보낸다. 2024년 재정지출 계획을 656조9000억원으로 편성해 2023년에 비해 2.8% 증가한 수준이다. 역대 최저 예산 증가율인 만큼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 공감이 간다. 세수가 부족한데 세출만 무작정 늘릴 수 없지 않은가? 부채에 의존해 늘릴 수야 있겠지만 재정건전성도 우려되고 추가 국채 발행에 따른 경제의 부담도 걱정이 된다. 더구나 2024년까지는 물가 안정에 최우선 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 판단되고 그런 점에서 긴축재정을 펼치는 것은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문제는 그 예산을 어디에 쓰느냐다. 예산 규모보다 용처가 중요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용돈을 준다고 해보자. 불량식품을 사 먹을지, 우유를 사 먹을지에 따라 같은 용돈의 효과가 다르지 않겠는가? 2023년 8월에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4년 예산안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12. 일반·지방행정’을 제외하고 분야별 예산 증액 혹은 감액 방향을 살펴보면 ’2. 교육‘과 ’5. R&D’만 줄였다. 교육 예산은 6.9%, R&D 예산은 16.6% 감액할 계획이다.
올해까지는 유망 기술이던 게 내년에는 사양 기술이 될 수 있는가? 올해까지 기술력을 쌓아오던 유망 기술 분야 연구원 중 일부가 내년에는 짐 싸서 집에 가야 한다. 가다가 중지해도 좋은 일이 있지만 R&D는 절대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한 법이다.
한국의 총 R&D 예산은 공공 R&D 예산이 25% 지급될 때 민간 R&D 예산은 75% 대응 자금이 투입되는 구조다. 공공 R&D 예산이 줄어들면 그 3배에 달하는 민간 R&D 예산이 줄어든다. 즉, 2024년 공공 R&D 예산이 5조2000억원 감액되면 민간 R&D 자금 또한 15조6000억원가량 감액될 수 있음을 뜻한다.
미래 있는 한국에 대한 구상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 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그림 그리고, 변화를 선도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진흥하고 산업을 재편해 나가야 한다. 앞서 독일 사례를 들었으니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어 보겠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전환하는 데 뒤처지면 현대차와 기아차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내연기관차에 필요한 부품이 2만~3만개에 달하고 전기차는 1만5000~1만8000개로 구성된다.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자동차 기업 하나만 휘청이는 것이 아니라 수천 개 중소 자동차 부품회사들이 함께 쓰러짐을 의미한다. 장기 침체에 진입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유망 산업에 대한 도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래지향적 예산을 계획할 필요가 있다. 미래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안 된다. 가계는 오늘내일을 고민할 수 있다. 기업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정부는 아니다. 정부는 중장기적인 미래를 고민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오늘과 내일의 경제가 혹독하게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정부는 중장기적인 미래를 그려나가야 한다. 교육과 R&D 같은 미래지향적인 부문에 대한 예산을 확충하고 가계와 기업이 역동적인 미래를 그림 그릴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김광석 필자 주요 이력
△한양대 겸임교수 △전 삼정KPM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전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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