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나서서 중재한다고 해도 할 일이 별로 없을 텐데요? 공무원이 조합원에게 '어쩔 수 없으니 공사비 받아들이라' 할까요, 건설사에게 '조합원들 힘드니 조금만 양보해달라'고 할까요? 중재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보여주기식에 가깝죠."
한 정비업계 전문가는 올 들어 곳곳에서 발생한 공사비 증액 갈등을 두고 "곳곳이 전쟁터나 다름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원자재 가격부터 인건비, 금융비가 전부 오르며 10대 건설사 영업이익률은 한자릿수에 머무르고, 중견·중소건설사는 영업적자를 이어가다 못해 망해간다. 건설사는 적자 보면서 사업할 수도 없고, 조합은 분담금 폭탄이라고 맞서서 답이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공사원가가 최근 1~2년간 폭등하며 종전 계약한 공사비를 두고 조합과 시공사 간에 갈등하는 사례가 전국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추가 공사비를 두고 조합과 시공사가 씨름하느라 사업 일정이 기약 없이 미뤄지는 것은 기본이고, 갈등이 격화하며 진행 중이던 공사가 올스톱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인다. 시공사가 완공된 단지 입주를 막다가 조합원과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어렵사리 공사비 증액 협상에 성공해도 갈등의 불씨가 꺼졌다고 안심하긴 어렵다. 과천주공4단지 조합은 시공사 GS건설과 증액협상을 마무리했으나 조합원 내부 불만이 커 조합장 해임 시도만 여러 차례 일어나고 있다. 공정률 30%인 청담르엘은 공사비 증액안건이 통과됐지만 갈등 요소가 남아 분양을 미루고 있다.
이 같은 공사비 갈등은 결국 조합이 더 손해보거나, 시공사가 더 손해보거나, 계약을 해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모두가 손해를 보는 셈이다. 계약을 해지하는 경우도 사업이 더 연기되는 만큼 추가 비용이 들고, 한번 계약을 해지한 사업장의 경우 시공사를 새로 구하기 힘든 사례도 적지 않다. 시공사야 더 손해 보기 전에 발 빼면 그만일 수 있지만, 조합 입장에선 정비사업이 하염없이 미뤄지는 최악의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공사비 갈등이 비일비재하지만 해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사비 갈등 중재기구는 국토부에도, 서울시에도 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이들 기구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거나, 실효성에 의문을 갖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다. 서울시가 만든 갈등중재기구는 서울 주요 지역 정비사업에 참여하는 대형 건설사 관계자들도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토부 건설분쟁조정위원회도 공사비 갈등 중재기구지만 그 역할은 제대로 검증된 바 없다. 국토부가 지난 10월 발표한 공사비 분쟁 완화 방안에도 중재 전문가 파견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서울시와 국토부가 마련한 중재기구 모두 강제성이 없는 데다 뚜렷한 성공 사례도 없어 조합과 시공사 모두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서울시 관계자에 따르면 현장에 전문가가 파견되는 경우는 갈등이 한창 진행되는 사업장이 아닌, 어느 정도 협의가 마무리된 곳에서 최종 조정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스스로 분쟁 사업장을 중재할 여력이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 국토부는 두 달 전 한국부동산원을 통해 공사계약 사전 컨설팅을 지원한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신청할 수 있는 인프라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민간 당사자 간 협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또다른 갈등중재기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강제성을 갖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만약 정부 기구에 강제성을 부여한다면 기구의 결정을 두고 공정성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라는 의견이다. 한마디로 중재기구가 힘이 있어도 문제이고, 없어도 문제인 것이다.
건설사 관계자들은 "시공사 입장에선 적자 보면서 사업을 고집할 필요가 없으니, 공사 못한다고 포기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결국 공사비 갈등이 해결되지 않을수록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이는 정비사업조합, 주민들이다. 공사비 폭등으로 허덕이는 각종 정비사업 현장과 달리, 정부 기관은 사뭇 한가한 모습에 의문이 든다. 정부 기구의 실효성이 낮다면 그대로 두고만 볼 게 아니라 현장 목소리를 듣고 대책을 보완해야 한다.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전문성 높은 대형 건설사와 협상하려면 비전문가 집단인 조합에게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니, 전문가 도움을 지원하자고 조언한다. 계약 사전단계뿐 아니라 물가상승 등 공사비 인상요인이 있는 전체 계약 기간 동안 전문가의 지원으로 계약 사항을 검토하는 방법 등이다. 이렇듯 시공사와 발주자 간 계약 단계부터 갈등의 불씨를 최대한 차단하고, 추후 한 쪽이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강제성을 갖고 결론을 지어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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