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상대방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단어는 ‘글로벌리스트(globalist, 세계주의자)’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이 지난해 공개적으로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자, 트럼프는 “다이먼은 과대 평가된 글로벌리스트”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뉴햄프셔주에서 진행한 선거 유세에서 트럼프는 경쟁자 헤일리를 거론하며 “그는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할 글로벌리스트”라고 지적했다.
‘K-팝의 세계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글로벌리스트가 주는 어감은 부정보다는 긍정에 가깝다. 그러나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세계화가 미국의 이익과 가치를 파괴한다고 믿는다. 최근 공화당 대선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압승한 트럼프가 승리 확정 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친 점은 이를 보여준다. 그는 "우리는 미국을 최우선(America first)에 두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열광했다.
트럼프가 아메리카 퍼스트를 처음 언급한 것은 2016년 3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였다. 그는 “나는 고립주의자(isolationist)는 아니지만, 아메리카 퍼스트를 지지한다”며 “나는 그 표현이 좋다. 나는 아메리카 퍼스트다”라고 말했다.
이후 트럼프는 이 단어를 선거 전면에 내세우며 세계화가 미국 노동계급, 특히 제조업 부문의 일자리를 없앴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17년 대통령직에 오른 후 그는 말대로 행동했다. 미국은 파리기후변화협약(COP21)을 시작으로 유네스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줄줄이 탈퇴했다. 트럼프는 세계무역기구(WTO), 세계보건기구(WHO) 참여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하거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빠지겠다고 엄포를 놓곤 했다. 이란 핵협정(JCPOA)은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사실 ‘아메리카 퍼스트’의 역사는 길다. 1940년 예일대 학생들이 세운 위원회, 아메리카 퍼스트 커미티(The America First Committee)가 시초다. 이 위원회의 회원은 총 80만명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평화 단체 중 하나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 시인 E.E. 커밍스, 월트 디즈니, 평화적 사회주의자 노먼 토머스, 뉴욕데일리뉴스를 창간한 조지프 메딜 패터슨, 시카고 트리뷴 발행인 로버트 매코믹, 미국 영웅으로 꼽히는 찰스 린드버그 대령 등 좌파와 우파 모두가 회원이었다.
이들은 미국이 유럽의 파시즘과 맞서거나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중국 침공으로 전 세계가 전쟁의 화염에 뒤덮인 속에서도 미국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미국인의 생명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게 이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 발생 며칠 뒤 아메리카 퍼스트 커미티는 해산했다. 아시아와 유럽의 전쟁을 ‘남의 집 불구경’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2022년에는 러-우 전쟁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전 세계가 신음했다. 2023년에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야기된 홍해 긴장이 전 세계 물류 시장을 혼돈에 빠뜨렸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미국의 리더십과 국제 사회의 협력이 필수다. 이번 미국 대선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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