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열풍의 주역인 엔비디아의 수장 젠슨 황. 그는 대만계 미국인으로 대만이 고향이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컴퓨텍스 참석차 지난달 26일부터 대만에 머무르고 있는 그에게 현지 언론과 네티즌들의 관심이 쏠린 이유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자국 출신이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젠슨 황의 한 팬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아이돌 덕질’과 (젠슨 황 덕질은) 큰 차이가 있다. 아이돌은 팬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진 않는다”면서 “대만은 그가 없으면 안 되고 그에게도 대만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말했다.
젠슨 황은 대만에서 ‘AI의 대부’로 불리며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다. 특히 대만을 방문할 때마다 야시장 등 서민 맛집을 직접 찾아 시민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그의 소탈함이 대만인들을 더욱 사로잡고 있다. 네티즌은 물론 언론들도 나서 ‘젠슨 황 맛집 리스트’를 만들 정도다. 대만 연합보는 “AI의 대부이자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의 매력이 대만 전역을 휩쓸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1일 젠슨 황이 대만 프로야구팀 웨이취안 드래곤즈의 시구자로 나선 날 그의 대만 내 인기를 가장 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날 경기는 2만9688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정규 시즌 단일 경기 관중 신기록을 세웠다.
젠슨 황이 시구자로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티켓이 바로 매진됐고, 구단은 현장 판매 티켓을 추가로 오픈했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 예매를 방불케 했다. 티켓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팬은 “젠슨 황을 보기 위해 왔다”면서 “실물 영접은 처음이라 흥분된다”고 했다.
시그니처 가죽재킷이 아닌 엔비디아의 창립 연도를 의미하는 등번호 93번(1993년) 유니폼을 입고 수만 명의 환호 속에 등장한 젠슨 황은 중국어와 민난어(대만 방언), 영어 등 3개 국어로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중국어로 “나는 대만에서 나고 미국에서 자랐다. 중국어는 미국에서 배워서 잘 못한다”고 했고, 팬들은 어설픈 그의 중국어에도 격려의 박수를 쏟아냈다.
젠슨 황은 대만에 대한 애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AI 시대가 우리 앞에 와있고, 대만이 그 중심에 있다”면서 “엔비디아는 대만 내 파트너들과 함께 새로운 전략을 세우고 함께 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날인 2일 팬들은 젠슨 황이 컴퓨텍스 기조연설 무대에 오르는 대만 국립 타이베이대학교 스포츠센터로 향했다. 시간당 30㎜가 넘는 폭우에도 팬들은 연설 3시간 전부터 그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이뤘다. 이날 행사에는 6500여명이 참석해 좌석을 가득 메웠다.
젠슨 황은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연설 동안 지난 3월 공개한 자사 최신 AI 칩 ‘블랙웰’ 실물과 함께 2026년 출시 예정인 차세대 칩 ‘루빈’을 공개하며 컴퓨텍스 문을 화려하게 열었다. 또한 그는 “대만은 숨은 영웅이자 세계의 기둥이다. 엔비디아는 대만에서 시작한다”며 AI 시대에 엔비디아와 대만 기업 간의 끈끈한 파트너십에 대한 강조도 잊지 않았다.
젠슨 황의 팬서비스도 아이돌 못지않다. 그는 이날 연설 3시간 전에 열린 프리이벤트 참가자들을 위한 깜짝선물로 대만 전통 간식인 ‘룬빙(潤餠)’을 직접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속사인 엔비디아도 나섰다. 페이스북 게시물에 '엔비디아 키노트'를 태그해 연설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을 댓글로 달면 젠슨 황 사인 포스터와 4만 위안 상당의 엔비디아 그래픽카드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다.
컴퓨텍스 정식 개막일인 지난 4일부터는 전시회 현장에서 현지 취재진과 만나 여러 이슈에 대해 언급하며 화제를 이어갔다. 대만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우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젠슨 황은 “대만 투자를 늘리는 이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친구인 TSMC가 있기 때문”이라며 “그들은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서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긴 말이 필요 없다”고 답했다.
앞서 젠슨 황은 5년 내로 대만에 대규모 연구개발(R&D)·설계 센터를 건립해 최소 1000여명의 엔지니어를 고용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 밖에 폭스콘(훙하이)과 함께 가오슝에 AI 슈퍼컴퓨터센터를 짓고 있으며, 2026년 완공 예정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대만에 대한 애정을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대만 내에서는 라이칭더 총통 취임 후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긴장 고조로 민심이 악화한 상황에서 젠슨 황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민심이 흔들리던 때 운이 좋게도 젠슨 황이 대만에 몰아쳤다”면서 “민중들은 엔비디아 관련주에 베팅하고, 젠슨 황이 갔던 맛집을 간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반전됐다”고 말했다.
젠슨 황도 지정학적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했는지, 아직 라이 총통과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다. 앞서 라이 총통이 컴퓨텍스 개막식 날 축사를 위해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날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중국도 젠슨 황의 대만 내 광폭 행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가 대만을 ‘국가’로 칭한 것을 꼬집고 나선 것이다. 젠슨 황이 지난달 30일 대만 파트너 업체와 만찬 자리에서 “엔비디아가 줄곧 대만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대만이 가장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게 문제가 됐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을 국가가 아닌 지방정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중국 네티즌들은 엔비디아 제품 불매운동을 촉구했다고 대만 매체들은 전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