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중국에서 생산하는 레거시 칩이 필요하다.”
세계 최대 반도체 노광장비업체 네덜란드 ASML의 크리스토프 푸케 최고경영자(CEO)는 9일(현지시간) 공개된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레거시 칩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지만 낮은 마진으로 업체들이 생산 확대를 꺼리는 상황에서 중국이 이를 충당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푸케 CEO는 그러면서 “유럽은 자체 칩 수요의 절반도 감당할 수 없다”면서 “누군가 당신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을 막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과잉 생산’을 지적하며 관세 장벽을 세우고 있는 미국 등 서방과 뚜렷한 입장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서방은 중국이 전기차와 태양광 패널은 물론 반도체 등 분야에서 자국 수요를 넘어서는 생산 능력으로 인해 남는 잉여분을 해외시장에 헐값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네덜란드도 서방에 속하지만, 중국이 중요한 시장인 만큼 ASML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최근에는 중국 측으로 더욱 기우는 모습이다. 앞서 피터 베닝크 전 ASML CEO는 “미·중 무역 분쟁은 사실이지만 내용·숫자·데이터가 아니라 이념에 근거해 진행되고 있다”면서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미·중 반도체 분쟁이 수십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의 요청으로 ASML은 첨단 노광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제재 대상이 아닌 28나노미터(10억분의1미터) 이상의 레거시 반도체용 장비는 중국에 팔고 있다. 미국은 최근 대중국 제재 고삐를 더욱 세게 죄면서 ASML에 이미 중국에 판매한 장비에 대한 유지·보수까지 중단하도록 압박하고 있지만 ASML은 중국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계속 제공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ASML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만에 이어 2위였다. 올해 1분기 중국 매출 비중은 무려 49%를 기록했다. 한국과 대만, 미국을 합한 수준보다도 높다.
실제 중국은 신규 반도체 장비가 필요한 반도체 제조 공장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미국·독일·일본 등은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자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도록 하기 위해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중국에 세워지는 반도체 공장 수를 따라가지 못한다. 국제 반도체 장비·재료 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새로 문을 여는 세계 신규 반도체 공장 42개 중 18개가 중국 공장이다.
미국의 대중국 추가 수출 통제 조치에 대해서 푸케 CEO는 제재 조치보다는 대응책을 세우는 게 먼저라고 지적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자국 내에 공장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의 (반도체) 생산을 어렵게 만들면서 자체적으로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푸케 CEO 또한 현재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미국보다 10년 정도 뒤처져 있다고 추정했다. 이어 그는 중국은 현재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ASML의 극자외선 라소그래피 장비를 재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ASML은 세계에서 최첨단 반도체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유일한 업체다.
한편, 서방의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로 중국 기업들이 레거시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높이면서 이를 첨단 기술 개발을 위한 디딤돌로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제 반도체 장비·재료 협회(SEMI)는 중국이 올해 반도체 공장을 18개 늘림에 따라, 중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도 전년 대비 13%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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