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낙인 26대 서울대 총장]
온 국민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2024년 12월 3일 밤의 비상계엄 선포로 야기된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이 긴 논란 끝에 변론종결로 최종 심판만 남았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구축하고자 한 87년 체제는 뜻하지 않은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얼룩져 마침내 그 종착역에 이르렀다. 이제 87년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얼룩진 탄핵의 흑역사를 되새김함으로써 미래 한국의 새로운 헌정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취임 1주년을 앞둔 2004년 벽두에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당선시켜 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그간 집권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기득권 세력인 소위 훈구파들에 휘둘린 채 새로 취임한 노 대통령의 정책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작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탄력을 얻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이에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 발언은 최고위 공직자로서 '헌법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배하였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마침내 야당인 한나라당에 새천년민주당 잔류파들이 합세해서 대통령 탄핵소추를 의결하였다(272명 중 가 193). 헌재는 대통령의 언행이 헌법과 법률을 위배하였지만 '중대한 위배'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관 전원일치 기각결정을 내렸다. 일부 재판관은 소수의견으로 탄핵인용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3 또는 7:2). 실제로 결정문을 보면 어떤 곳에서는 탄핵을 인용하는 듯한 표현도 보인다. 특히 헌재는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및 국회를 비하하여 헌법 준수 의무를 위반하였다는 소추사유에 대하여는 위헌이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당시 헌재법에서는 탄핵심판에서 소수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명문 규정이 없어 이런 어설픈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에 헌재법 개정으로 소수의견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탄핵심판의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4월 15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절대 과반수를 확보하였다. 소위 ‘탄돌이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하였다. 민심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소추한 세력을 강하게 응징하였다. 탄핵에 부화뇌동하던 새천년민주당은 궤멸적 패배로 민주노동당에도 뒤지는 겨우 제4당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그 후 민주당 찬탄 의원들은 국민 앞에 후회와 반성으로 극히 일부만 정치권에서 살아남았다. 그만큼 민심을 외면한 정치행위는 설 자리가 없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헌재의 탄핵 기각으로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국민적 호응에 따라 대통령직에 복귀한 대통령이 국민적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다. 노무현 정권은 결국 후임 대통령선거에서 참패함으로써 다시금 엄중한 민심의 심판을 받았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당인 새누리당에서 이탈한 세력이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에 동조함으로써 탄핵소추되었다(299명 중 가 234). 당시 초점은 소위 비선실세 최서원의 국정농단이었다. 그러나 과연 국정농단을 할 정도로 비선실세였는지, 아니면 비선이었지만 탄핵에 이를 정도로 실세가 아니었는지에 관한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만장일치로 탄핵이 인용되어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돌이켜보면 박 대통령이 국정농단을 했는지에 대한 견해는 분분할 수 있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 때 헌재가 내린 '중대한 위배'에 해당되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이 시점에서 살펴보더라도 최서원의 국정 개입 정도가 과연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탄핵에 이를 정도의 중대한 것이었는지에 관하여는 논쟁적일 수 있다. 그것도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지금도 의문을 가지는 관측론자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헌재는 최서원과 관련되지 아니한 사안이지만 탄핵정국의 화두로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사안들, 예컨대 공무원 임면권 남용, 언론의 자유 침해, 불성실한 직무 수행에 대한 소추사유에 대하여는 위헌이 아니라고 판시한다. 특히 정작 세월호 참사로 촉발된 대통령의 생명권 보호의무 등에 대하여는 '대응 조치에 미흡하고 부적절한 면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다.
노무현·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집권여당이 무너지면서 그 이탈세력이 야당과 규합하여 탄핵소추가 가능하였다. 심지어 탄핵소추위원장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데 그는 바로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으로 탄핵소추를 진두지휘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당한 현재 여당의 원내대표로 반탄에 앞장서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있어야 하지만 여타 탄핵 대상자는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에서 보듯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직무에 대한 탄핵소추는 대통령에 준하여 의결정족수를 충족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총리 탄핵소추 의결정족수로 충분하다고 결정하였다. 87년 체제에서 여야 어느 쪽이든 간에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을 확보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여야 어느 쪽이든 한쪽이 무너지지 않으면 대통령 탄핵소추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평범한 격언이 한국 민주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집권세력의 이탈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 탄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탄핵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노 대통령과는 달리 탄핵 이전에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 등으로 민심이 상당 부분 이반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재임 중 실시된 2016년 총선거에서 집권여당의 패배가 이를 입증한다. 그 패배 또한 다름 아닌 소위 ‘옥쇄파동’까지 이어진 청와대가 개입한 공천파동에서 비롯되었다.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이 총선 패배로 이어져 의회권력을 상실하고 마침내 야당이 국회의장을 차지하였다. 이 순간에 이르러서는 청와대는 민심 수습에 노력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안주한 결과 탄핵의 단초가 열린 것이다. 2024년 총선거에서 참패한 집권세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결국 탄핵정국에 이른 점도 이와 유사하다. 이는 현실의 탄핵 여부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실제로 탄핵소추 사유 중 하나로 적시된 박 대통령의 '불성실한 직무수행'에 대하여 헌재는 탄핵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위헌·위법의 문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노무현·박근혜 탄핵은 대통령이 행한 일련의 정치적 행위의 결과물이 쌓여서 탄핵에 이르렀다. 윤석열 정부에 대하여 더불어민주당이 헌법상 예외적·비상적 제도인 탄핵소추·국무총리국무위원해임건의를 남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직접적으로 탄핵을 촉발한 것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은 스스로가 자초한 점에서 앞의 탄핵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번 탄핵은 헌정사에서 수많은 최초라는 기록을 남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어느 날 밤 불시에 발동한 비상계엄 선포, 두 시간 만에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에 따라 다섯 시간 만에 계엄 해제, 현직 대통령이 헌법 제84조의 형사상 불소추특권을 배척하는 내란 우두머리(수괴) 혐의 구속, 구치소 수감, 52일 만에 구속 취소로 석방되어 관저 복귀, 대통령 권한대행인 총리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 부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구속 상태에서 공수처와 서울중앙지법 법정에 이어 헌재에 대통령 직접 출석, 사상 최장기간 헌재 심리 등.
무엇보다 대한민국 호에 치명적인 것은 극심한 민심 분열에 따른 찬탁, 반탁의 극한 대결이다. 그 과정에서 반전과 반전을 거듭한다. 국민 여론에 힘입은 민주당의 과속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문제 해결 방식은 심플하다. 탄핵소추 사유를 간단명료하게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령은 비록 통치행위의 일종이긴 하지만 헌법 제77조에서 요구하는 비상계엄 발동 요건을 위배한다는 점, 그리고 비상계엄 포고령 제1호 제1조에 있는 국회의 권한에 대한 침해만 적시하면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1차 소추안에는 한·미·일 동맹에 기초한 대통령의 가치동맹 외교정책까지 탄핵소추 사유로 제시하는 우를 범하였다. 더 나아가 내란 혐의를 넣음으로써 내란 우두머리, 즉 수괴라는 프레임을 가져다 붙었다. 결국 탄핵소추는 비상계엄 때문에 한 것인데 비상계엄은 뒷전으로 밀리고 내란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관한 논쟁으로 주객이 전도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민주당으로서는 내란죄를 소추 사유에 넣음으로써 헌법 제84조 대통령의 형사상 특권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통령을 내란 혐의로 소추함으로써 민주당의 장외투쟁 과정에서도 내란 수괴 또는 내란 우두머리가 가장 강력한 대국민 홍보효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사범인 내란죄 확정까지는 기나긴 형사법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에 대통령 탄핵은 비상계엄으로 충분하였는데 논점만 흐리게 했다. 정작 심판 과정에서는 스스로 내란을 제외하였다. 그런 점에서 탄핵에 내란 혐의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헌재 결정이 지체되고 있다. 이에 시중에는 탄핵 인용과 기각 또는 각하까지 다양한 견해로 설왕설래한다. 헌재는 그간 쟁점별(爭點別) 합의제가 아니라 주문별(主文別) 합의제를 채택한다. 즉 논쟁적인 사안에서 개별적인 쟁점별로 표결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에 초점을 맞추어서 전체적으로 표결하여 주문으로 위헌 여부 또는 인용 여부를 결정한다. 달리 말하자면 쟁점별로 합헌·위헌 또는 인용·기각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결론은 이를 종합하여 주문으로서 인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취지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에서도 일부 쟁점에서는 기각도 하고 반대로 인용도 하였지만 주문에서 최종적으로 노 대통령은 기각, 박 대통령은 인용을 판시한 것이다. 헌재법, 민소법, 법원조직법 등 관련 조문을 종합하여 헌재는 다음과 같이 주문을 내린다. 즉 여러 가지 의견이 중에서 어느 의견이 결정정족수에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당사자에게 유리한 견해에 순차로 다음 견해를 더하여 결정한다. 따라서 이번 탄핵사건에서 그 어떠한 경우라도 인용 의견이 6인 이상이 되지 않으면 이는 기각 또는 각하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자면 재판관 8인 중에서 만약 인용 의견이 6인 미만이고, 기각 또는 각하 의견을 합하여 3인 이상이라면 탄핵은 인용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탄핵사건에서 인용 또는 기각·각하 숫자가 어느 쪽이 더 많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용이 6인 이상이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특히 위헌법률심판에서는 일부 위헌이나 헌법불합치와 같은 변형 결정이 가능하지만, 탄핵심판에서는 이와 같은 변형 결정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인용이냐 아니냐만 있을 뿐이다.
탄핵 인용 여부와 관련하여 갖가지 이론과 학설들이 난무하면서 전 국민이 헌법학적 소신을 피력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헌재 결정정족수를 두고서도 논쟁이다. 탄핵심판 과정에서 국민들의 헌법 지식을 고양시킨 점에서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라는 변론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주권자를 상대로 한 이런 식의 계몽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필자 주요 이력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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