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전 국회의원]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 시도가 실패한 표면적 이유는 의료계의 조직적 반대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문제의 본질을 진단하지 못하고 충분한 준비 없이 접근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의사 수 증원의 공적 가치와 필요성을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고, 의료계와의 일방적 대립 구도로 인해 정책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의료대란으로 구급차가 병원을 찾지 못하고 환자가 연달아 사망하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고, 응급환자 치료 지연으로 치료 시기를 놓친 환자 수가 전년 대비 40% 증가했고, 응급실 내 사망률 역시 13.5% 상승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 2023년 2월부터 7월까지 초과사망(excess mortality)이 3136명으로 의·정 갈등으로 인한 피해를 보여준다. 이처럼 필수의료 인력 부족과 수도권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맞물려 빚어진 의료대란은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국 의료체계의 고질적 문제는 의료인력과 시설의 불균형이다. 인구 대비 의사 수는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하지만 더 큰 문제는 지역·진료 편중과 1차 의료 기반 부재로 인한 비효율적 자원 활용이다. 의료전달체계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1차 의료기관(동네의원)→2차 중소병원→3차 대형병원의 단계로 환자가 관리·의뢰되는 체계가 이상적이지만 한국은 사실상 환자 자유 이용에 가까워 역할 구분이 모호하다. 게다가 1차 의료에 대한 낮은 수가와 한정된 역할로 인해 고혈압·당뇨 같은 만성질환 관리나 예방의학적 서비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경증 환자까지 대형병원으로 몰리는 악순환이 지속되었고, 예방보다 치료에 집중된 비용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공공보건의료는 약화되고 국민의료비 부담은 증가하고 있다.
의사 수 증원만으로는 이러한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의료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1차 의료(Primary Health Care)는 가장 포괄적이고 형평성 있으며 비용효과적인 보건의료 접근 방식'으로, 사람들의 평생 건강 요구에 대응하여 보건 시스템의 효율성과 대응력을 높인다고 강조한다. 이 방향 전환의 핵심이 바로 ‘주치의 제도’의 도입이다.
주치의 제도는 국민이 자신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맡길 수 있는 주치의를 지정함으로써 1차 의료를 강화하는 제도다. 이 모델은 국민에게 평생 건강관리의 주치의를 제공함으로써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서는 만성질환 관리와 예방, 복약 지도 등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의료의 연속성을 높여 치료 누락이나 중복을 막고, 불필요한 입원이나 응급상황을 예방하여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의료비 지출 절감을 목표로 한다.
주치의 제도는 현재 우리 의료체계의 왜곡된 자원 분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다. 주치의는 지역사회에서 포괄적인 1차 진료를 제공하므로 환자들이 경증이나 일상적인 건강 문제로 곧바로 대형병원에 몰릴 필요가 줄어든다. 이는 경증 환자의 대형병원 이용을 줄여 중증 환자에게 의료자원을 집중할 수 있게 하고, 1차 의료 의사에게 적절한 보상과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지역 간 의료인력 배치를 보다 균형 있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는 2005년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며 환자들이 주치의를 거치지 않고 전문의에게 바로 가면 본인부담금을 대폭 높이는 등의 장치를 도입했는데 이로 인해 환자들의 이용 경로가 개선되고 의사들에게는 만성질환 환자 관리 의무가 부여되어 1차 의료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프랑스는 제도 시행 4년 만에 건강보험 지출의 약 1%인 1억3000만 유로(약 2000억원)를 절감했다. 특히 비보험 의료비 지출은 30% 가까이 줄어들며 큰 효과를 입증했다.
‘국민주치의’ 제도 도입 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가정의학과 등 1차 의료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도입 필요성이 주장되어 왔고, 2000년대 후반에는 보건복지부가 만성질환자 대상 ‘단골의사 제도’ 시범사업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료보험 수가 조정 등 제도 개혁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활성화되지 않았다. 2024년 말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이에 걸맞은 평생 건강관리 체계를 갖추지 않는다면 의료비 폭증과 의료공급 붕괴를 피하기 어렵다. 주치의 제도 도입은 지속 가능한 보건의료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필수 과제가 되는 것이다.
첫째, 의료전달체계 개편이 필수적이다. 현재 무너진 의뢰-회송 시스템을 정상화하기 위해 상급종합병원과 1차 의료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적으로 대형병원의 경증 환자 외래 진료 제한을 두는 방안과 주치의를 통한 의뢰서를 갖고 온 환자에 대해 병원은 가산점이나 수가 지원을 받는 체계를 마련할 수 있다. 프랑스처럼 환자의 자발적 경로 준수를 유도하는 재정 장치(주치의 경유 여부에 따른 본인 부담 차등 등)를 도입하고, 일본처럼 병원의 회송률 공개와 평가를 실시하여 대형병원이 일정 비율 이상 경증환자를 1차 의료로 돌려보내도록 유도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1차-2차-3차 의료기관의 연계를 강화함으로써 주치의 제도가 실질적으로 환자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둘째, 수가 체계의 현실화와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 주치의 제도 도입과 함께 성과에 기반한 새로운 지불보상 시스템, 구체적으로는 인두제(capitation)와 성과연동지불(P4P), 일부 행위별 수가를 혼합한 혼합형 지불제도를 1차 의료에 도입하여 예방과 환자관리 성과를 올리는 의사에게 유인책을 주어야 한다. NECA(한국보건의료연구원)도 “현행 1차 의료 수가체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주치의제도 등의 책임의료 조직을 도입해 성과 기반·혼합형 지불제도로 의료의 질 향상과 비용 절감을 이뤄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셋째, 공공의료의 역할 확대가 병행되어야 한다. 주치의 제도하에서 지역사회 의료를 뒷받침하는 인프라는 공공의료기관과 인력이다. 현재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 비중이 낮은 우리 현실에서 지역 거점 공공병원과 보건소, 국공립 요양시설 등을 주치의 제도와 긴밀히 연계시킬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보건소의 방문간호사, 건강증진 인력 등을 주치의들과 팀을 이루게 하고, 공공병원은 주치의가 의뢰한 중증 환자를 책임지며 동시에 지역의료 인력의 교육·훈련 거점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의료취약지에는 공중보건의 등 공공인력을 주치의로 참여시켜, 민간 인력이 부족한 지역 주민들도 차별 없이 주치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기존 이해관계와 충돌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제도 안착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와의 긴밀한 소통과 설득 과정이 필수적이다. 긴밀한 의사소통을 통한 설득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설득과 함께 단계적 시범시행을 통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수정하여 안착시키는 것이다. 우선 고위험군인 60세 이상 노년층을 대상으로 시범 실시를 제안한다. 노인들은 만성질환 보유율이 높고 의료이용 빈도가 높기 때문에 주치의 제도의 효과가 가장 즉각적으로 나타날 집단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먼저 지역 단위 시범사업을 시행하여 주치의 제도의 운영 방식을 정립하고, 의료진과 환자의 수용도를 높여갈 수 있다. 60세 이상에서 시작해 50대 성인, 더 나아가 전 연령층으로 주치의 등록제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특히 소아청소년의 예방접종과 성장 발달 관리, 산모들의 산전관리 등 생애주기별 맞춤 건강관리까지 주치의 제도로 포섭하게 되면 명실상부한 국민 주치의 제도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1차 의료 인력도 양성과 재배치를 통해 확충해야 한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비롯하여 내과, 소아과 등 1차 의료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의를 폭넓게 주치의로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주치의 제도의 정착은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의료자원의 효율적 배분, 둘째, 고령화 사회에 적합한 평생건강관리체계 구축, 셋째, 농어촌 등 의료취약지 개선이 그것이다. 주치의 제도하에서는 지역 단위로 인구 대비 적정 의사가 배치되고, 이동 진료나 원격의료를 통해서라도 해당 지역 주민의 주치의 서비스를 책임지게 된다.
특히 국민 의료비 절감과 건강보험 재정의 건전성 제고라는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주치의 제도는 불필요한 중복검사와 과잉진료를 억제하고, 질병을 조기에 발견·관리하여 비용이 큰 응급실 방문이나 입원을 예방함으로써 전체 의료비 지출의 증가세를 억제할 수 있다.
의대 정원 확대라는 미시적 해법이 아닌 주치의 제도라는 거시적 해법을 통해 우리는 의료대란을 극복하고 국민건강을 지킬 수 있다. 의료자원의 효율적 분배와 평생건강관리 체계 구축, 의료격차 해소와 의료비 절감이라는 일거다득의 효과를 가져올 주치의 제도는 한국 의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여는 열쇠다. 지금이야말로 ‘국민주치의’ 제도를 통해 의료개혁을 본격 추진할 때가 왔다. 정부와 의료계, 그리고 시민사회가 함께 지혜를 모아 모든 국민이 주치의를 갖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길 기대한다.
이용우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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