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품 보는 두 가지 태도, 진위와 귀속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라 불리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분명 화가로서는 뛰어난 예술적 업적을 남겼지만,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성격, 여성 착취적인 행태는 예술적 성과와 별개로 엄중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사실 그는 고귀한 야만인이란 낭만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여전히 복잡하고 논쟁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이렇게 고갱처럼 다양한 면모로 이루어진 정말 불가해한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은 최근 고갱의 작품을 둘러싼 진위문제 즉 ‘귀속’(歸屬Attribution)과 관련된 논의만 봐도 그렇다.고갱도 유명세만큼 작품의 귀속 여부를 두고 말들이 많은 작가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작품의 진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서구에서는 ‘귀속’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작품의 진위 문제를 상업적이기보다는 학술적인 영역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미술품의 문화적 예술적 가치의 중요성이 뿌리내리기 전에 경제적 가치와 작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짧은 미술 시장의 역사로 인해 한국은 작품의 ‘진위’ 여부를 중시한다. 반면, 서구에서는 오랜 미술사 연구의 전통 속에서 작품의 역사적 맥락과 예술적 의미를 폭넓게 탐구하며, 작가가 불분명한 작품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설득력 있는 작가나 시기를 ‘귀속’시키는 학술적 논의를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귀속’이라는 용어는 확정적인 ‘진위’보다는 학문적 탐구와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신중한 표현이다.
서구 미술계가 ‘귀속’을 학술적 영역으로 여기는 것은 단순히 ‘누가 그렸느냐’보다 작품의 양식, 시대적 배경, 사회문화적 의미, 영향 관계 등 폭넓은 학문적 탐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를 명확히 단정하기 어려운 때에도 관련된 최대한의 정보를 바탕으로 ‘특정 작가의 양식에 가깝다’, ‘특정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는 식의 학술적 논의를 해나간다. 특히 서구 미술사에서 작가가 불분명하거나, 문하생들과 함께 제작한 작품 그리고 고대나 중세의 경우 기록이 부족해 정확하게 작가를 특정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사적 연구를 위해 ‘귀속’은 가능한 가장 설득력 있는 작가나 그룹, 시기를 제안하는 학술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귀속은 확정적인 결론이 아닐 수 있으며,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번복될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서구에서도 진위여부는 중요한 가치 평가 요소지만, 학술 연구는 시장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작품 자체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탐구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둔다. 또 과학적 분석 기술이 발전했지만, 모든 작품의 진위를 100% 확실하게 가릴 수는 없다. 특히 오래된 작품의 경우 재료의 유사성 등으로 인해 과학적 증거만으로는 작가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학자들은 양식 분석, 역사적 기록, 동시대 자료 등 다양한 증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귀속’이라는 학술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미술품의 생사여탈권
샌프란시스코에서 멀지 않은 캘리포니아주 스톡턴(Stockton)에 자리한 해긴 박물관(Haggin Museum)은 폴 고갱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꽃과 과일>(Flowers and Fruit, 1889년경)을 1939년부터 소장해 왔다. 하지만 1964년 파리와 뉴욕의 고갱 전문 연구자들은 작품의 소재 파악이 안 되자 분실된 작품으로 정리했다. 이후 작품을 발견(?)한 미술사가 스테파니 브라운(Stephanie Brown)이 2018년 뉴욕에 있는 와일덴슈타인 플래트너 연구소(Wildenstein Plattner Institute)에 연락해 작품의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연구소의 고갱위원회는 고갱의 최신판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에서 제외했다. 이는 적어도 연구소는 <꽃과 과일>을 고갱 작품이 아니라고 단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왜 제외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에 브라운은 100여 년 동안 진작으로 여겼던 작품이 진품이 아니라고 판단한 과정을 추적한 <사라진 고갱 사건: 진품성과 미술시장에 관한 연구> (The Case of the Disappearing Gauguin: A Study of Authenticity and the Art Market, 2024)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박물관과 브라운은 이를 토대로 해긴박물관에서 <사라진 고갱> (The Case of The Disappearing Gauguin, 2024.10.3.~2025.6.6.)전을 열었다. 전시에 많은 관람객이 몰리자 1개월 연장하며 관람객들이 증거를 보고, 작품의 진위에 관해 판단 해 보도록 했다.
사실 <꽃과 과일>은 1929년 미국의 경제불황 즉 대공황의 전조였던 주식시장 붕괴 2개월 후, 서부의 골드러시 상속녀이자 1931년 개관한 해긴박물관의 설립에도 기여한 에일라 해긴 맥키(Eila Haggin McKee, 1873~1936)가 뉴욕 라인하르트화랑(Reinhardt Galleries)에서 5000달러에 구입, 10여 년을 소장하다 1939년 해긴 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이다. 이후 이 작품은 박물관에서 계속 전시되었지만, 스톡턴 외 지역에서는 거의 90년 동안 이 작품의 존재를 몰라 사라졌다고 단정했다. 이렇게 박물관과 수집가 그리고 지역 주민의 자랑거리로, 한 세기가 넘도록 진작으로 여겼던 작품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위작이 된 것이다. 이런 작품의 기구한 사연은 “예상치 못한 연결과 놀라운 간극”을 지닌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지녔다.

우선 작품의 소장이력(Provenance) 즉 “소유권과 점유권의 이전 과정”을 살펴보면 고갱의 작품으로 귀속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문제는 고갱 자신에게 있었다.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분열된 관계’로 가득 찬 ‘방랑의 삶’을 살았던 고갱은 자기 작품의 소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특히 생전에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길 필요도, 사람도 없었다. 고갱의 에이전트였던 유명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7?~1939)도 우리나라 화상들에 비하면 매우 정확하지만 “유명할 정도로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는” 기록을 남겼던 인물이다. 또 20세기 초 화상들 간의 복잡하고 불투명한 관계를 통해 미술품 판매를 비밀리에 판매하는 것이 관행이던 탓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작품이 제작되었던 130년 전 이미 의심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7개의 사과와 꽃이 꽂혀있는 검푸른색과 붉은색 꽃병이 파란색 꽃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자리한 <꽃과 과일>은 최신판 레조네에는 제외되었지만 1964년 판 와일덴슈타인 연구소의 고갱 카탈로그 레조네에는 ‘진품’이나 ‘분실’(Disparu) 또는 ‘실종’(Missing)되었다고 적혀있다. 또 리졸리 출판사에서 1972년 가브리엘 만델 수가나(Gabriele Mandel Sugana, 1924~2010)가 펴낸 <고갱의 전작>(L'opera completa di Gauguin)에도 실렸다.
<꽃과 과일>은 현재까지 분석한 결과 1889년 고갱이 브르타뉴(Bretagne) 해안의 한 여관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작품은 '고갱'의 전형적인 화풍이 아닌 '평범'한 그림이다. 유화, 드로잉, 판화 등 모두 700~8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고갱에게 정물화는 약 12~13%에 불과하다. 특히 <꽃과 과일>은 그의 다른 작품과는 친연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브라운의 지적처럼 고갱이 소장했던 폴 세잔(Paul Cézanne,1839~1906)의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1879 ~80)과 유사하다. 그는 프랑스나 타히티에 머무르면서 종종 작품을 친구나 지인들에게 맡겨두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지거나 하면 작품을 돌려받지 못하기도 했다.
<꽃과 과일>에는 고갱의 서명 위에 “친구 로이”(à l'ami Roy)라고 써있어, 로이에게 헌정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은 우선 “로이”가 정확하게 누군지 찾아 나섰다. 고갱이 남긴 원본 자료를 꼼꼼히 살핀 결과 루이스 로이(Louis Roy, 1862~1907)는 당시 젊은 작가로,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하면서 고갱의 목판화 작업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루이는 고갱이 사망한 직후 볼라르에게 6점의 고갱 작품을 팔 정도로 고갱의 작품 여러 점을 소유했었다. 로이가 사망하고 2년 후 그의 아내는 2점의 고갱을 더 팔았다. 그렇게 판 8점 중 <꽃과 과일>은 없었다.
고갱이 죽고 20여 년이 지난 1920년대 초, 고갱에 관한 관심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시카고 미술관을 포함한 주요 미술관들은 고갱의 작품을 소장품에 추가했다. 1923년, <꽃과 과일>은 파리의 경매장인 오텔 드루오(l’Hôtel Drouot)의 경매에 나온 루이 루아 컬렉션의 여러 점의 고갱 중 하나로 위탁되었다. 당시 이 작품은 고갱의 대표작으로 여겨졌다. 유명한 프랑스 배우 사샤 기트리(Alexandre Pierre Guitry, 1885~1957)가 작품을 1만4000프랑(현 1만 달러)에 구입했다. 6년 뒤, 기트리는 이 작품을 다시 드루오에 내놓아 아마추어 수집가 막스 카가노비치(Max Kaganovitch,1891~1971)를 대신해 화상인 그에티엔 비뉴(Étienne Bignou, 1891~1950)가 입찰에 참여해 4만2700프랑(현 2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이후 런던으로 건너간 작품은 기증자인 에일라의 남편 밥 맥키(Bob McKee, 1872~1943)의 눈에 띄었고 연말 뉴욕의 라인하르트 화랑에 온 작품을 부부는 구입했다. 그리고 1939년, 부부는 스톡턴의 해긴 박물관에 작품을 기증했다. 하지만 지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박물관에는 작품을 카탈로깅(Cataloging)할 미술사 전공자 레지스트라나 큐레이터가 없었고, 권위있는 미술계와의 연결은 물론 외부 전문미술사가의 조언이나 도움을 받을 네트워크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품은 점차 잊혀지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꽃과 과일>은 한때 해긴 박물관의 자랑이었다. 작품은 기념품 가게의 머그컵, 컵받침, 엽서 등으로 제작되어 판매되었다. 하지만 2018년 그림의 출처가 불확실하다는 와일덴슈타인 연구소의 판단 때문에 박물관은 작품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의 역사와 출처를 탐구하는 특별전이 열리면서 박물관 전시실로 다시 돌아왔다. 바로 옆에는 바클리 미술관&태평양 필름자료관(BAMPFA)이 소장한 고갱의 <캉페르 도자기가 있는 정물화>(Nature morte au biberon de Quimper, 1889)가 함께 전시되어 두 작품을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들
이런 명백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꽃과 과일>은 고갱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미술품의 귀속 여부를 따질 때, ‘위작’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진작’이라고 판단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위작이라고 판정하는 순간 그 작품은 존폐의 위기에 처하거나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관리부실로 치명적인 상태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2024년 7월 발간된 와일덴슈타인 연구소의 최신판 고갱 카탈로그 레조네는 고갱의 정물화 두 점을 더 삭제했다. 하나는 코펜하겐 글립토테크 미술관(Ny Carlsberg Glyptotek)이 소장한 <양파와 일본 목판화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Onion and Japanese Woodcut, 1889)로 1923년 <꽃과 과일>이 나온 경매에서 구매한 작품이고, 또 하나는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한 <부채가 있는 정물>(Nature morte à l'éventail, 1889년경)이다.
하지만 지난주, 즉 5월 14일경 바젤 시립미술관(Kunstmuseum Basel)이 소장하고 있는 고갱의 <안경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Glasses, 1903)이 다시 진위 문제가 대두되었다. 고갱의 마지막 작품이자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고갱 작품에 정통한 아마추어 미술 탐정 파르리스 푸르마누아르(Fabrice Fourmanoir, 1957~)가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롯되었다.

바젤미술관은 1945년부터 소장해 온 <안경 쓴 자화상>의 조사를 시작했다. 문제를 제기한 푸르마누아르는 작가가 고갱이 아니라 고갱이 죽은 후 베트남 혁명가로 프랑스 식민통치에 저항하다 폴리네시아로 유배와 고갱과 가깝게 지냈던 키 동(Nguyen dit Ky Dong VAN CAM, 1875~ 1929)이 1910년대 초에 1902년 찍은 고갱의 흑백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란 주장을 펼쳤다. 또 자화상에 서명이 없는 점, 작가와 닮은 부분이 조금 보이지만, 갈색 눈이 아닌 푸른 눈, 인물의 코가 고갱 특유의 매부리코가 아닌 점 등을 지적했다. 특히 키 동의 아들은 1980년대에 이미 푸르마누아르에게 이 자화상은 키 동이 그린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 유통에는 고갱 말년에 히바오아섬에 살면서 가까이 지냈던 스위스 화상 루이스 그렐레(Louis Grélet, 1870~1945)와 공모했다고 주장했다. 푸르마누아의 주장에 따르면 이 초상화를 유럽 미술시장에 처음 내놓은 그렐레는 유명한 미국의 초상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조카와 공모해 1924년 2월 6일 소더비 런던 경매에 이 작품을 출품해 수익금을 서로 나누기로 했다. 하지만 사기를 의심한 조카의 아버지가 이 작품을 구매해 사기죄로 감옥에 갈 수 있는 아들을 구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고갱이 1903년 5월 8일, 54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고갱의 카탈로그 레조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고갱이 베트남 혁명가 키동에게 직접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945년부터 바젤 미술관은 작품을 소장해 왔다. 하지만 미술관의 출처 조사에서 소장 당시부터 작품의 진위가 분명치 않아 “고갱작으로 추정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던 점을 발견했다. 작품은 1924년 런던 소더비에 나온 이후 스위스 컬렉터 칼 호프만(Karl Hoffmann, ?~1944)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쿤스트할레 바젤에 기증되었다. 당시 미술관장 게오르크 슈미트(Georg Schmidt,1896~1965)는 이 작품의 진위에 대해 “고갱이 작품을 완성할 당시 아팠고 피곤했기 때문에 작품에서 ‘미학적 결여’가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또 미술관의 19세기와 근대미술 큐레이터인 에바 레이페르트(Eva Reifert, 1981~)도 “슈미트는 자신이 진작이라고 완전히 확신했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작품을 컬렉션에 추가할 만큼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작품은 일부 학자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았고 특히 1964년 처음 출간된 와일덴슈타인 카탈로그 레조네에 동일 작품이 수록되었다. 레조네에 수록되었다는 이유로 이후 큐레이터나 수복 보존가는 작품을 의심하지 않았고, 따라서 적외선 반사 분광법(IRS, Infrared Reflectance Spectroscopy)이나 방사선 같은 정교한 분석 기법을 통해 작품을 조사할 생각을 할 필요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미술관이 서둘러 조사에 착수한 것은 푸르마누아르가 고갱 작품의 위작을 밝혀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적어도 작품의 기원에 관한 철저한 조사를 촉발할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이미 미국의 게티 미술관(The Getty)이 2002년 300만~500만 달러(약 40억~68억 원)에 구입 한 희귀한 고갱의 조각 <뿔 달린 머리>(Head with Horns, 1894년 이전)의 진위문제를 제기해 결국 고갱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주목을 받았다. 2019년 이후 게티 미술관은 작가명을 ‘작가미상’으로 수정해 지금은 전시하지 않고 있다.

게티미술관이 2002년 작품을 입수했을 때 <뿔 달린 머리>는 고갱이 처음 타히티를 방문했던 시기 쓴 일기 <노아 노아>(Noa Noa, 1901년 출간)의 원고에 있는 2장의 사진으로만 알려진, 폴리네시아에서 영감을 받은 희귀한 자화상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J. 폴 게티 재단의 최고경영자였던 배리 무니츠(Barry Munitz, 1941~)도 “게티를 방문하는 모든 방문객은 타히티 파나이우아에 있는 고갱의 자택에 전시되었던 이 강렬하고 개인적인 조각에 감동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뿔 달린 머리>는 1997년 생폴 드 방스의 매그재단(Fondation Maeght) 전시에 나와 찬사를 받았고, 게티 미술관에 소장되기 이전인 2003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에서 열린 <고갱 인 뉴욕 컬렉션: 이국의 유혹>(The Lure of the Exotic: Gauguin in New York Collections, June 2002.6.18.~10.20)과 2014년 뉴욕 근대 미술관(MoMA)에서 열린 <고갱: 변신>(Gauguin: Metamorphoses, 2014.3.8.~6.8)전을 비롯해 여러 전시에 출품된 전시이력(Exhibition history)을 지녀 작품의 진위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티가 소장한 이후에도 작품은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밀라노 문화박물관(Museo delle Culture) 전시에 출품되었다. 하지만 <뿔 달린 머리>는 오랫동안 작품의 출처 즉 ‘귀속’ 여부에 관해 미술사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의심을 받아왔다. 하지만 유명미술관 전시에 출품되고 레조네에 등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데 2015년, 푸르마누아르는 고갱의 친구인 아마추어 사진작가인 쥘 아고스티니(Jules Agostini,1859~1930)의 사진첩에서 <뿔 달린 머리>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에서 <뿔 달린 머리>는 당시 민족지학 미술품 수집가이자 조각품의 소유주였을 가능성이 있는 조르주 라가르드(Georges de Lagarde)의 사진 옆에 있었다. 사진의 촬영 시기는 모두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갱은 아마 아고스티니로부터 이 사진을 얻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1895년 가을 타히티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갱은 이 조각에 매료되어 이후 두 장의 사진을 토대로 목판화(1898-99년경)와 두 개의 드로잉(1900년경)을 위한 다른 구도의 <뿔 달린 머리>를 그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때 고갱의 작품으로 잘못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는 “마르케산의 우상”(Idole Marquisienne)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는 이 작품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마르키즈 제도 출신의 원주민 조각가가 제작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사진이 촬영된 시기가 고갱이 프랑스에 머물던 1894년 12월 이전으로, 고갱이 타히티에 머물며 조각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1895년~1897년보다 앞선다는 것도 밝혀졌다. 또 작가의 서명이 없는 점도 문제였다.
푸르마누아르의 이런 발견은 전문가들의 귀속문제를 따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더구나 조각의 원형 받침대는 목선반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이는 고갱은 사용하지 않던 기법이다. 재료도 타히티가 아닌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사용했다는 점은 최소한 고갱의 작품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티 미술관은 백단향(Sandalwood) 조각상과 레이스우드(Lacewood) 받침대를 조사했으며, 일부 폴리네시아 미술 전문가들은 조각상의 악마의 뿔 모양의 도상이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유럽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여기에 푸르마누아르는 유럽인 관광객이 조각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작품의 소장경로도 불명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티미술관은 2002년 이 작품을 프랑스계 미국인 거대 화랑인 와일덴슈타인 앤 컴퍼니(Wildenstein & Company)에서 구입했다고 밝혔다. 작품 구입시 게티에서 작품출처를 문의했을 때 와일덴슈타인은 스위스 개인 컬렉터로부터 구입했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화랑의 제한적인 출처 보고는 학술적 권위 즉 고갱의 레조네에 수록된 사실로 증명이 되었다.

이해충돌?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세계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활동 중인 와일덴슈타인의 연구소가 고갱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특히 와일덴스타인 가문이 공개적으로 논란에 휩싸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에서 께름칙하다. 와일덴스타인 화랑은 부인하고 있지만 프랑스에서 세금을 포탈하고, 분실되거나 도난당한 미술품을 숨기고, 심지어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와 미술품을 거래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현재 여러 소송에 휘말려 있기도 하다. 와일덴스타인 화랑은 2019년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의 위작인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판매한 혐의로 소송을 당했다. 원고는 1985년 와일덴슈타인 앤 컴퍼니(Wildenstein & Co.)에서 보나르의 작품을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가 2018년 판매를 위해 경매에 출품했는데 보나르의 작품으로 귀속할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974년 장 도베르빌과 헨리 도베르빌 부부(Jean & Henry Dauberville)가 와일덴슈타인 연구소에서 펴낸 보나르의 카탈로그 레조네에는 등재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굴지의 화랑인 페이스(PACE Gallery)도 소송에 휘말렸다. 루이스 네벨슨(Louise Nevelson, 1899~1988)의 조각 작품을 소장가가 2022년 5월 소더비 경매를 통해 내놓으려고 하자 네벨슨의 작품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인 안 글림처(Arne Glimcher, 1938~)가 진품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결국 소장가는 글림처의 갤러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사실 작품의 변동하는 진위에 관한 이야기는 “문화적 권력과 정체성, 그리고 예술계가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카탈로그 레조네가 절대적인 기준이라도 되는 양 말하지만, 레조네에서 제외되었다고 위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레조네는 실은 특정 작가의 모든 진품 작품을 목록화하는 “표준 학술 참고 자료”일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보나 진품 여부에 대한 재평가가 있을 때마다 업데이트 또는 수정된다.
미술계에서 진위의 문제, 귀속의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답할 수 없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누가 진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 또 “진품성”(Authenticity)의 정의는 무엇일까? 미술품이 최종적으로 소장되는 소장처 즉 미술관, 유명 개인 컬렉터, 또는 지역 역사박물관이란 것이 작품의 진위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출처연구(Provenance)에 혹시 어떤 내재적 편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진위결정에 있어서 어떤 집단 또는 유형의 예술가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작품을 둘러싼 이런 관행은 종종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며 불분명한 인간의 본성과 역사가 전개되는 방식을 반영하는 것일까? 그리고 미술품 거래에 관련된 이들의 판단은 이해충돌의 여지는 없는 것일까? 작품의 손바뀜에 관련된 이들의 진술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들이 결정을 내린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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