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급박하게 치르는 대한민국 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보니 대선이 블랙홀로 모든 걸 빨아들이고 있고 사람들 또한 정치적으로 예민해진다. 민주주의 특성상 부득이한 비용이어서 그렇다고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정치를 업으로 하지 않는 여러 계층·분야의 사람들이 새삼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는데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파를 갈아타는 정치인이 보이는 것도 그러려니 한다. 최근에 이런 사람 가운데 개인적으로 주목한 이는 고(故) 최진실 딸인 최준희씨였다. 최씨가 정의한 자신의 정체성이자 사회적 통용되는 호칭은 인플루언서인 듯하다.
최씨는 SNS에 “혹시 내가 좋아하는 인플루언서가 정치적 발언하는 건 좀 그렇겠지”라고 전제하면서도 “난 좌파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선거 날 다가오니 마음이 너무 조급해지네”라고 정치적 의견을 표명한 이유를 적었다. 논란을 부르자 이 게시물은 비공개로 전환됐다고 한다. 뉴스에서 다뤄주고서야 알게 된 최씨의 정치적 의견이 나에게 큰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작고한 최진실의 딸이라는 사실에서 일면식이 없는 최씨에게 주제넘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던 터라 그의 소식이 반갑기도 하고 동시에 ‘좌파 없는 나라’라는 그 인식에 궁금증이 생겼다.
■좌파 없는 나라=뉴스메이커인 전광훈씨는 22일 자신이 목사로 시무하는 사랑제일교회에서 지역 광역위원장들을 앞에 나오게 한 뒤 교인들 앞에서 ‘원산폭격’을 시켜 다시 한번 지면을 달궜다. 전씨의 행태를 자세히 다룰 마음은 없고, 다만 그가 이끄는 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대국본)의 해명 입장문에서 “사적 성격의 모임 일부를 떼어내 정치적 공세에 활용하려 한다면 좌파 진영 내부 행사에서 나온 발언과 행동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다뤄야 할 것”이라고 언급한 게 최씨의 발언과 함께 떠올랐다. 대국본은 “지금 좌파 언론사들의 행태야말로 참으로 극단적”이라고도 했다.
아무렇게 사용되는 ‘좌파’라는 용어를 정의하기 위해 정치학이나 역사를 거론할 생각은 없다. 내가 보기에 한국 정치 지형에서 좌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광복 후 지금까지 가끔 좌파를 기도한 정치세력이 없진 않았지만 남북 분단이란 특수한 상황에 기인해 뿌리내리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자유시장경제를 부인하는 정당 자체가 없다.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양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직 중 제안한 대연정 구상이 시사하듯 내용상 하나의 이념을 대표하는 두 개의 파당일 따름이다.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용어는 정치적 실체라기보다 적의 별칭에 불과하다.
좌파라고 불리는 세력이 있지만 좌파를 자임하는 세력은 없다. 반면 우파는 호명과 실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최씨가 말한 ‘좌파 없는 나라’는 어쩌면 이미 실현되었다. 대한민국은 한 번도 ‘좌파 없는 나라’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가 의기투합한 사안은 공급망실사법으로 불리는 유럽연합(EU)의 ‘기업 지속 가능성 실사 지침(CSDDD)’. 두 사람은 이 법안이 미국·중국과 경쟁에서 유럽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철회를 요구했다.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 21일 독일 건설업의 날 행사에서 이 법을 폐지하거나 적어도 개혁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우리 중 누구도 아동 노동을 원치 않으며, 이를 조장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 조건과 인권을 옹호한다. 나처럼 이 법이 이상적으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기업을 신뢰한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며 “적어도 EU 법률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이러한 근본적인 불신이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메르츠 독일 총리가 거론한 CSDDD는 EU 역내 대기업이 자사 공급망에 강제노동이 존재하거나 환경에 피해를 주는 요소가 있는지를 점검하고 시정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으로 원래 2027년부터 적용될 예정이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앞서 20일 베르사유에서 열린 투자 서밋에서 “(해당 법안을) 아예 테이블에서 내려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소속인 메르츠가 총리로 취임해 처음 브뤼셀을 방문해 이 법안의 폐지를 요구한 지 10일 만에 나온 화답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금은 메르츠 총리 및 몇몇 동료와 확실히 보조를 맞췄다”며 “이 법안뿐 아니라 몇몇 규제들은 1년 유예가 아니라 완전히 철회돼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이미 지난 1월 환경 규제 시행을 늦추고 CSDDD 시행을 무기한 연기하자는 제안을 EU에 제출했으며 이에 따라 EU 집행위원회는 기업의 행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법안 수정안을 내놓은 바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지난 2월 독일 총선 결과로 경제 자유주의 성향인 메르츠가 정권을 잡으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다. 다만 메르츠 총리의 입장이 독일 정부 전체의 공식 입장인지는 불분명하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CSDDD를 지지하며 “공급망에 대한 법적 규제는 유럽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프랑스·독일 정상이 직접 개입하며 흐름이 급변한 건 사실이다. CSDDD 폐기는 애초에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개입이 없었다면 EU 회원국이 이 시점에 타협안을 도출했을 수 있었다.
■미국에 이어 유럽마저=유럽 의회가 지난 4월 초 EU 집행위원회의 ‘일시 정지’ 지침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기업 지속 가능성 보고 지침(CSRD)’과 CSDDD 등 주요 규제의 시행이 연기됐다.
이 합의안은 531대 69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으며, 극좌와 극우 정당이 제출한 일부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이번 합의는 EU 이사회에서 회원국 대표들이 ‘일시 정지’ 지침을 승인한 데 이은 것이며 EU 집행위원회 ‘옴니버스 패키지’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이 패키지는 기업, 특히 중소 및 중견기업의 지속 가능성 보고 및 규제 부담을 대폭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옴니버스 패키지는 지난 2월 EU 집행위가 발표한 것으로 CSRD, CSDDD, 녹색분류체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ESG와 관련한 다양한 규정의 개정, 정확하게는 완화를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CSRD는 보고를 시작하지 않은 기업에 대해 시행 시점을 2년 연기하고, CSDDD 이행 및 적용 시점을 1년 연기하는 방안을 포함했다.
옴니버스 패키지는 최근 발표된 EU 경쟁력 지표를 통해 유럽의 생산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목표와 일치한다. 이 지표는 모든 기업에 대해 보고 부담을 최소 25%,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35%까지 줄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독일과 프랑스 지도자가 주요 법안의 폐지까지 거론하고 나선 형국이어서 지속 가능성 보고 규제는 더 느슨해지고 공급망 실사 지침은 아예 좌초할 우려가 커졌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며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은 프랑스·독일 지도자의 친기업 정책에 우호적인 여건이 되고 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이 흐름에 힘을 보탰다. 지난 17일 멜로니 총리는 메르츠 독일 총리를 만나 EU가 자동차 부문을 중심으로 전기화를 추진하는 것이 유럽 대륙의 제조업 경쟁력을 약화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멜로니 총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유럽 산업의 사막화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멜로니 총리는 EU의 과거 규제 방식이 너무 경직적이어서 자동차 산업과 같은 분야를 파괴했다면서 유럽이 비유럽 국가들이 장악하고 있는 전기차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며 이를 전략적 취약성이라고 지적했다.
■대외적 배타성=유럽 내부의 규제 완화가 그렇다고 외부에 똑같이 적용되는 건 아니다. EU 집행위원회는 22일 발표한 삼림 벌채 방지법을 통해 벨라루스, 미얀마, 북한, 러시아에서 수입되는 상품을 삼림 벌채를 부채질할 ‘고위험’으로 분류했다. 세계 최초로 제정된 이 법은 콩, 소고기, 팜유, 목재, 코코아, 커피, 초콜릿 등 제품을 EU 시장에 출시하는 기업에 실사 요건을 부과한다. 브라질과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국가들은 이 법안이 부담스럽고 비용이 많이 든다며 완강히 반대했다.
법에 따라 EU는 고위험 국가의 대EU 수출 기업의 9%, 표준 위험 국가는 3%, 저위험 국가는 1%를 대상으로 규정 준수 검사를 수행해야 한다. 고위험 및 표준 위험 국가의 기업은 상품이 언제 어디서 생산되었는지 보여주어야 하며, 2020년 이후 삼림이 벌채된 땅에서 재배되지 않았다는 ‘검증 가능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EU의 이 법률은 대기업은 2025년 말부터, 중소기업은 2026년 6월부터 적용된다. 법 위반 시 EU 국가의 회사 매출 중 최대 4%에 해당하는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미국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세계 경제는 혼돈의 도가니다. 태평양 양쪽의 G2가 맞대결 국면인 데다 트럼프의 막가파식 전술이 불확실성과 긴장을 키우고 있다. 유럽의 극적인 변화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한 모습일 수 있다.
지난해 12월 탄핵 이후 한국 정부는 개점휴업 상태다. 경제전쟁에서는 좌파도 우파도 없다. 얼마 뒤면 새로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미 우리나라는 ‘좌파 없는 나라’이니 좌우를 떠나 ‘경쟁력 있는 나라’를 만들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세계 주요 국가의 정상이 어떤 식으로든 국익을 지키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국가 지도자의 역할이, 수사가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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