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갈등과 분열이 많이 해소되었다. 독재와의 투쟁이 끝났고, 여야의 갈등과 대립은 더 좋은 대한민국을 위한 선의의 경쟁으로 받아들여졌다.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영호남 갈등도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의 진영 갈등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태이다. 북핵 문제를 비롯하여 북한은 남한을 상대로 적대적 태도를 강화하는 등 남북한 긴장관계가 고조되고 있으나 그보다 남한의 보혁 갈등이 더욱 심각하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은 과거와 같은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소모적 갈등, 파괴적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지목되고 있다. 그로 인해 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통합이라는 이야기가 사방에서 나온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 통합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민주주의 기본 이념으로 널리 인정되는 자유와 평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다원적 사회 구조가 오히려 통합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다양한 이념과 요소들로 구성되는 정치 시스템으로 이해된다. 민주주의 핵심적 요소로 인정되는 것만도 자유와 평등의 이념 이외에 국민주권, 의회주의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다수결 원칙, 다원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통합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개인이 각기 다양한 견해를 갖고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으며, 유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끼리 단체를 구성하여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원주의는 가치의 다원성, 이익의 다원성, 집단을 다원성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공동체 내 자유와 평등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지만 그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은 나라에서는 통합의 난도가 더욱 높아진다.
과거 전제군주제나 전체주의 시대의 통합은 일원적 가치에 의한 통합이었다. 군주의 명령 또는 전체주의 이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원 주의였다. 그러나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다원주의의 통합은 다양한 가치들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 모든 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주적 통합은 오로지 소통과 공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될 뿐이다. 진정한 민주적 통합은 다양한 가치들과 주장들을 하나로 묶어 일원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목소리를 가진 채 소통을 통해 공통분모를 찾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정치에서도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정작 진정한 소통을 통해 민주정치를 발전시킨 대통령은 찾기 어렵다. 그것은 무엇보다 대통령이 인의 장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측근들과의 소통을 국민과의 소통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지층과의 소통을 전체 국민과의 소통으로 착각한 탓도 크다.
돌이켜보면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으로 평가되던 노무현 대통령도 국민과의 소통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은 있었으나 소통의 절차와 방식의 문제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많았으며 총리나 장관들조차 대통령과의 만남 자체가 쉽지 않았던 역대 대통령들 모두가 국민과의 소통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철을 벗어나 대통령이 진정으로 국민과 소통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첫째, 소통은 여야를 망라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집중적으로 야권과의 소통, 반대파와의 소통에 집중해야 한다. 양쪽 이야기를 모두 듣는다는 것은 사실상 측근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소통의 의미는 찬성과 지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빈대와 비판을 수렴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국민과의 소통이나 야권과의 소통이 즉흥적인 것이 되거나 이벤트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여주기식 소통이 아니라 정말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비판할 수 있는 소통이 되어야 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쓴소리를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몸에 좋듯이(良藥苦口利於病).
셋째, 진정한 소통은 지속성과 안정성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와 기능, 성과를 모든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통의 시기와 방식 등이 제도화될 필요가 있으며 소통의 결과로 국정이 개선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을 이루기 위한 합리적인 절차와 방법의 제도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체주의적 통합이 반대파의 제거 또는 억압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민주적 통합은 합리적 소통을 통한 공감대의 확산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통합은 반대의 자유 속에서만 가능하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진정한 자유는 반대할 수 있는 자유’라고 말했듯이 진정한 민주적 통합은 비판과 반대의 자유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진영, 같은 정파 내에서의 소통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며 민주적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지지층과의 소통도 마찬가지다. 만일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국회가 합쳐진 힘으로 반대와 비판을 억누르려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도 아니고 민주적 통합도 아니게 된다. 힘에 의한 평화란 무덤 속의 평화일 뿐이다.
민주화 이후 최대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이제 갈등과 분열을 넘어서 통합을 이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는 새 정부와 대통령만의 과제가 아닌 국가 전체, 국민 전체의 과제이며, 남북한의 긴장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치열한 글로벌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도 국민 통합의 성공은 필수적 전제이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비상임위원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 ▷전 국회 개헌특위·정개특위 등 자문위원 ▷전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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