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배터리 업계가 수조 원을 투자한 미국 현지 공장에 숙련 인력을 제때 파견하지 못하면서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 정부가 전자여행허가제(ESTA)를 통한 단기 입국을 사실상 '편법 취업'으로 간주하며 입국 규제를 강화한 데 따른 것이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배터리 3사는 최근 미국 공장에 기술 인력을 파견하는 과정에서 입국 거부·지연 사례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ESTA를 활용한 단기 출장이 현지 공항 당국에 의해 제지되고 있다.
배터리 업계는 현장 인력 부족으로 공장 조기 가동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호소한다. 공정 초기에는 설비 점검, 품질 안정화, 기술 이전 등 숙련 인력이 수개월 간 상주해야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조 원을 들여 공장을 지었는데 핵심 기술 인력을 제때 투입하지 못하면 생산 차질로 납기를 맞추기 어렵다"며 "브랜드 이미지와 품질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요인"이라고 토로했다.
단순한 인력 부족 문제를 넘어 글로벌 생산 거점 재편 전략에도 악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보조금 등을 받기 위해서는 현지 생산이 필수적이다. 공장이 정상 가동되지 않으면 대규모 투자 효과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제조업 유치를 강조하면서도 설비를 돌릴 인력은 못 들어오게 막고 있는 셈"이라며 "이 상태가 장기화하면 국내 기업들은 생산지 이전이나 투자 축소를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STA를 대체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외국인 전문직 비자(H-1B)는 추첨제로 경쟁률이 높고, 단기상용 비자(B-1)는 인터뷰까지 수개월이 걸려 긴급 파견이 어렵다. 이에 따라 업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기반으로 한 전용 비자 쿼터 신설을 요청하고 있다. 싱가포르나 호주처럼 연간 수천명 규모의 별도 쿼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중소 장비업체들의 피해가 심각하다. 한국배터리산업협회 관계자는 "대기업보다 인력 대체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미국 진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정부 차원의 외교적 대응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해법을 모색 중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기업들이 겪고 있는 비자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주한 미국대사관 및 현지 공관과 협의를 지속하는 상황"이라며 "한국인 전문인력 전용 비자 신설을 위한 ‘한국 동반자법(PWKA)’ 입법 필요성도 미 의회를 상대로 적극 개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유럽 간 제도 격차를 지적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유럽연합(EU)는 단기 기술비자를 통해 90~180일 체류가 가능해 한국 기업들이 헝가리, 폴란드 등지에는 비교적 원활히 인력을 파견하고 있다"며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에 대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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