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바로 이 정권교체기에, 우리는 다시 익숙하고도 불편한 장면을 마주한다. 예나 지금이나, 보수정권에서나 진보정권에서나 국회 청문회장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어딘가 뻔뻔, 내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선 공직 후보자들은 여전하다. 그리고 단골 메뉴도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자녀 입시 비리, 병역 기피, 탈세, 논문 표절, 연구비 유용, 이중 국적, 갑질 의혹 등 변함이 없다.
놀라운 건,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는 의혹은 더 정교해지고 규모는 커지지만, 정작 후보자들의 반성과 책임 의식은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직 후보자로서 최소한의 도의조차 실종된 현실에 국민은 분노와 실망을 넘어 이제는 냉소로 반응한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공직이란 무엇인가? 공직자의 자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능력도 중요하고 전문성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러한 공직자는 ‘국민을 대표하는 윤리적 상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친다. 그들의 논리는 대부분 이렇다. “그땐 다들 그랬다”, “법적으로 문제 없다”, “가족이 한 일 이다”, “이제 와서 물러나는 건 책임 회피이다.” 그러나 국민이 묻는 것은 법 위반 여부가 아니라 양심이 작동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맞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많다.
오늘날 공직 후보자들 가운데 제대로 된 ‘인물’을 찾기 어려운 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고도의 압축성장을 겪는 동안, 국가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부문이 성장의 논리 아래 재편되었다. 물질적 성과는 이루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신적 성숙은 이루지 못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에 길들여진 이들은 부, 명예, 권력을 무분별하게 추구했다. 심각한 철학의 부재다. 셋 중 하나를 가졌으면, 나머지를 넘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청문회장은 그 모든 것을 독식하려는 자들의 무대처럼 보인다.
스스로 생각해 보라. 내가 이 자리를 맡을 깜냥이 되는가? 설마 이것까지 알까, 이건 들키지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임명장을 받으려 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고도성장기와 정보화 사회는 함께 도래했다. 정보화 시대에 ‘과거’는 비밀이 아니다. 어느 미국 영화의 경고처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는 말은 이제 공포 영화의 대사가 아니라, 현실 사회의 감시 시스템이 된 지 오래이다. 공직자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이제는 국민이 다 안다. 공직은 신용의 무대이지 은폐의 피난처가 아니다. 깜냥이 안 되면, 애초에 나올 생각을 마라. 그것이 최소한의 양심이다. 그런 점에서, 청문회 과정에서 수많은 결격 사유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고수하려 했던 일부 장관 후보자들이,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으로 사퇴한 것은 비록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공직은 누구나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나설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능력과 경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도덕성과 철학이 결여된 사람은 그 자리에 서는 순간부터 자격을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떠날 줄 아는 미학’만이 아니라, ‘애초에 나서지 않을 줄 아는 겸손’도 함께 요구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바로 안다. 그러나 욕심이 눈 앞을 가린다. 나는 이 자리에 설 만한 사람인가? 지금껏 걸어온 삶의 궤적이 이 직분과 어울리는가? 국민 앞에서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인가? 만약 그 질문 앞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망설임이 생긴다면, 애초에 후보조차 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양심이자 책임이다. 정보화 사회는 과거를 숨길 수 없는 시대다. 자격 없는 이가 그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된다. 이제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만큼이나, ‘처음부터 나설 자격이 있는가’를 성찰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진짜 공직 윤리의 시작이며, 국민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공직 후보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직분에 대한 철학과 실질적인 전문성이다. 단순히 스펙과 경력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지식인 명백지(明白知)와 경험과 통찰로 체화된 지혜인 암묵지(暗默知)를 고루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종종 국방부 장관은 반드시 장군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려의 서희나 강감찬은 무관 출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칼을 들진 않았지만, 전쟁을 이기게 한 영웅들이었다. 장군이 꼭 사격의 명수(名手)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직분의 본질을 꿰뚫는 철학과 상황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이다. 인사청문위원들은 공직 후보자에게 얄궂은 퀴즈를 던지면서 ‘누가 누가 잘 하나’, ‘도토리 키재기’ 놀음을 멈추고, 공직 후보자들의 암묵지를 보는데 집중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명언으로,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는 널리 알려진 말이다. 원래 이 문구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문구로,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애용한 말이기도 하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자기 성찰을 넘어 인간 존재의 책임과 도리를 향한 물음이다. 나는 지금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에 설 자격이 있는가? 내 과거는 지금의 자리와 어울리는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와 겸손이야말로 진짜 자격이다. ‘한비자’에 ‘목불견첩(目不見睫)’이라는 말이 있다. 눈은 멀리 있는 것은 보면서도 정작 자기 눈썹은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청문회장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는 넘치지만,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를 성찰하는 이는 드물다.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국민을 보겠는가? 요즘 젊은 세대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낄끼빠빠’, 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지라는 뜻이다.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은 자리와 책임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이다. 지금 이 나라의 공직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것 아닐까. 자격 없는 자는 끼지 말고, 때가 지난 자는 물러나라.
이형기 시인의 「낙화」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한다. 봄날 떨어지는 꽃을 보면서 삶의 유한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반대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모르는 무지(無知)한 이이거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면서도 미련 때문에 얼쩡거리는 이의 앞모습은 얼마나 추한가! 공직은 영속적인 자리가 아니다. 특정 정권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자리한 이들이라면, 정권이 바뀌었을 때 후임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 공직 윤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심지어, 국민 대다수가 이제 그만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음에도, 눈치 없이 자리를 지키며 월급만 축내는 ‘국민 적폐’ 들도 있다. 그들 역시 ‘떠남의 미학(美學)’을 모르는 자들이다. 스스로 물러날 명분이 없으면, 머물 명분도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고집이 조직 전체를 병들게 한다는 점이다. 책임지지 않는 문화는 전염되고, 정권이 바뀌어도 자리를 고수하려는 얄팍한 눈치는 결국 정책의 추진력과 국정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된다. 그래서 이제 국민은 단호히 말한다. 그 자리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국민의 환호와 갈채 속에서 출범한 민주당 정부가 돌부리에 걸려 주춤거리기보다, 군더더기를 과감히 정리하고 국민과 함께 쾌속 질주하길 바란다. 그 출발은 낄 것인가, 빠질 것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불필요하게 끼어들 사람은 빠지고, 제자리에 설 사람만이 제자리에 서는 ‘낄끼빠빠’의 원칙이 지켜질 때, 유선형을 갖춘 이재명호의 순항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들어갈 것인가, 머무를 것인가, 떠날 것인가. 답은 멀리 있지 않다. 거울 앞에 선 그대가 스스로에게 묻고, 정직하게 답하라. ‘떠남’, 즉 ‘빠빠’의 미학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낄끼’의 미학이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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