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주식시장에 '가치투자'라는 개념이 등장한 건 2000년대 초다. 이채원, 강방천 등 쟁쟁한 '고수'들이 가치투자 1세대로 꼽힌다. 테마주, 단타 중심의 투자가 대세였던 국내 증시에서 가치투자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워런 버핏처럼 저평가된 가치주를 발굴하고, 장기투자를 통해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투자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여전히 국내 증시에서 투자자들의 관심을 끄는 건 테마와 단타다.
코스피 5000시대를 내건 이재명 정부는 이런 국내 증시의 체질 변화를 추진 중이다. 상법 개정 등을 통해 증시의 펀더멘털을 바꾸는 시도가 한창이다.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소를 제거하고, 장기 투자를 유도해내겠다는 큰 그림이다. 일단 출발은 양호하다. 코스피 지수는 3000선에 공고히 안착했다.
장기투자의 중요성이 주목받는 시기에 국내 대표 가치투자 하우스인 라이프자산운용 강대권 대표를 만났다. 강 대표는 국내 가치투자 2세대의 선두주자다. 그는 라이프자산운용의 투자전략을 한마디로 '주주협력주의'라고 정의했다.
"진화한 가치투자로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
주주협력주의는 무엇일까. 강 대표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대부분 저평가된 이유는 거버넌스(지배구조) 때문인데 이 거버넌스가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 종목들을 찾아본다는 게 우리의 콘셉트"라며 "그래서 도입한 게 주주협력주의라는 개념"이라고 말했다.행동주의와의 차이점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행동주의라는 건 거버넌스가 나쁜 기업을 찾아가서 고치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우리는 뭐 도와드릴 게 없는지, 회사가 개선될 수 있을 부분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프렌들리하게 접근한다"며 "과거 가치투자와는 조금 다른, 진화된 가치투자를 해보자고 창업한 게 라이프자산운용"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가치투자라는 게 워낙 지겨운 이름이기도 하고 너무 뻔한 일이기도 해서 새롭게 변화를 해보자고 해서 2021년 창업을 했다"며 "(가치 대비) 저평가된 종목이 제 값에 평가를 받아야 되는데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다 보니 저평가된 종목들 가운데 저평가 요인이 해소될 수 있는 종목들을 찾으면 좋겠다는 관점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구상을 반영한 게 '인게이지먼트팀'이다. 다른 자산운용사에 없는 조직이다. 보통 운용사 주요 조직은 크게 리서치와 운용으로 구성되지만 라이프자산운용은 여기에 인게이지먼트팀을 추가로 만들었다. 강 대표는 "투자한 종목에 제안을 하고 계속 관계를 맺어가는 증권사의 기업금융(IB)과 비슷한 팀"이라며 "주주서한을 발송하거나 의결권 행사, 경영진 면담 등을 이 팀에서 전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우리가 투자하는 회사에서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면 투자자를 소개해주고 이런 자금 조달 과정에서 어떻게 더 원활히 이뤄질 수 있는지 제안도 한다"며 "투자 회사가 인수합병(M&A)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타깃도 선정해 주는 등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도움을 준다"고 덧붙였다.
"숫자보다 중요한 건 5년, 10년 뒤 장기 비전"
라이프자산운용이 제시한 새로운 가치투자에 대해 기업들의 반응이 처음부터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다. 강 대표는 "시작할 때와 비교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점점 빠른 속도로 좋아지는 것 같다"며 "외부 투자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는 회사가 거의 없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최근 사회 분위기가 점점 상장기업들한테 지배구조 개선, 주주 환원 등을 많이 요구하는 상황이다 보니까 앞으로의 전망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그럼 가치투자의 대상은 어떤 기업일까. 흔히 가치투자의 경우 전통적 투자지표인 주가수익비율(PER), 주가순자산비율(PBR) 등을 많이 고려한다. 강 대표는 그러나 단순히 숫자를 통해 접근하는 것은 기업가치의 일부만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 대표는 "내년 이익, 다음 분기 이익 등 이런 것만 가지고 예측을 하는데, 단기 이익은 기업가치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회사가 5년 뒤, 10년 뒤 어떤 회사가 될 것인가에 대한 장기 비전이 중요하다"며 "당장의 이익이나 자산 가치 등은 기업가치의 극히 일부이기 때문에 실제로 가치투자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이 회사의 먼 미래'에 대한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강 대표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 대상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뭘까. 그는 "기업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경영진의 퀄리티를 보는 것"이라며 "당장 예상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해결해 나가는 건 경영진인데, 그 경영진이 어떤 전략을 갖고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가치투자 과정에서 '밸류 트랩'도 주의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밸류 트랩'은 저평가 됐는데도 주가가 저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다. 밸류 트랩에 걸린 종목은 저렴하다고 샀다가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강 대표는 "밸류 트랩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지배구조 이슈"라며 "대주주들이 주가 상승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저평가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정상적인 회사라면 개선 노력을 하겠지만,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회사는 밸류 트랩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며 "대부분 상속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대주주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파악하는 게 밸류 트랩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투자대상, 투자자 모두에 신뢰받는 운용사 될 것"
강 대표는 가치투자에 대한 오해도 지적했다. 가치투자라고 해서 무조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개념은 틀렸다고 짚었다. 그는 "모든 투자 수익은 시간에 비례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기간 기다렸으면 엄청난 수익이 나야 하지만, 가치투자 등 보수적 투자 방법은 기본적으로 고수익이 안 난다"며 "남들처럼 화려하게 성과를 내진 않아도 수익을 빨리, 꾸준히 내야 한다"고 말했다.이어 "기본적으로 적정한 수익을 꾸준히 내는 게 바람직한 투자라고 본다"며 "지난 4년 동안 운영을 하면서 우리가 내세우는 강점은 고수익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어떤 구간을 끊어봐도 비슷한 수익을 낸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라이프자산운용은 한국투자신탁운용과 국내 자산운용사 간 첫 협업 ETF를 선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라이프자산운용이 기업의 정책, 거버넌스, 주주환원 정책의 현실성 등을 분석한 비재무적 요소 분석 자료를 만들면, 이를 참고해 한국투자신탁운용이 투자 종목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 ETF의 연초 이후 수익률은 40.55%로 관련 상품 중 수익률 1위에 올랐다. 최근 1년 수익률(38.86%) 역시 1위를 기록 중이다.
강 대표는 "처음에는 이런 협업이 가능하겠나, 상품이 애매한 것 아니냐 등 우려가 많았다"며 "하지만 특정 테마나 특정 섹터에 쏠리지 않은 채 잘 분산되어 있고, 각 종목이 서로 보완하며 수익을 내는 균형 잡힌 모습이 주주가치라는 콘셉트와 잘 어울렸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 ETF는 꾸준하게 계속 성과를 내자는 콘셉트를 지향했기 때문에 단기 고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는 테마 ETF나 특정 섹터 ETF를 투자하는 게 맞다"면서 "안정적으로 끌고 간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의미에서는 퇴직연금이나 장기적으로 투자하려는 투자자에게 적합한 상품"이라고 설명했다.
라이프자산운용이란 사명에서 'LIFE'는 'Longterm Investment For Everyone'의 약자다. 모두를 위한 결과를 얻어내는 운용사가 되자는 철학이 여기에 담겼다. 주주협력주의를 통해 투자회사도, 투자자도, 운용사도 모두가 좋아지길 바라는 의미다. 그가 그리는 라이프자산운용의 미래도 이런 모습이다.
강 대표는 "운용사는 돈을 벌고 증권사는 덩치가 커졌지만 그동안 재미를 본 고객은 많지 않았다"며 "그렇다 보니 운용사에 대한 신뢰는 없고 직접 투자를 선호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경제에서 자본시장의 역할이 있고, 이를 잘 흘러가게 만들어주는 게 운용사"라며 "우리는 모두를 위한 장기 투자를 통해 신뢰받을 수 있는 운용사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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