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는 그간 영토의 20% 정도를 빼앗겼고, 무려 56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공식 발표는 없으나 민간인 피해는 제외하더라도 죽거나 다친 병사들이 적어도 수십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24년 4월 징집 연령을 27세에서 25세로 내렸는데 병력난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최근 경제가 다소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이는 전쟁 첫해 경제성장률이 무려 -29%를 기록할 정도로 심각하였던 것에 따른 기저효과(基底效果)에 불과하다. 국내 정치 상황도 녹록지 않다. 젤렌스키는 임기가 이미 작년 5월에 끝났으나 전쟁 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아직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 이에 대한 반발이 있는 데다 측근들의 고질적인 부패 의혹으로 곤경에 처해 있으며 전쟁 지속에 대한 국내 여론의 지지도 상당히 하락하였다. 그동안 서방에서 막대한 군사 원조를 받았는데 상당 부분은 무상이 아니라 갚아야 하는 빚이다. 그 빚의 규모가 수천억 달러에 달하며 게다가 전후 복구에 드는 비용도 그에 못지않을 것으로 예상되어 전쟁이 끝나도 우크라이나는 외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실제 전장 상황은 어떠한가? 그간 우크라이나군은 서방의 무기 지원에 힘입어 나름 선방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최근 전황은 우크라이나가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여서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에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요구하였지만 러시아의 으름장에 눌린 서방이 자제하고 있으며, 설사 그런 무기를 제공하더라도 러시아 본토 공격용으로는 쓰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결국 양측의 군사력 차이를 고려할 때 서방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 없는 한 전세가 역전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는데 미국은 개전 초기부터 미군의 파견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전쟁 초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튀르키예의 중재로 협상을 시도하여 상당한 진전을 보였을 때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협상을 중단하고 전투를 지속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뒤에도 우크라이나군의 열세가 계속되고 사상자가 급증하는데도 서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기 지원을 약속하며 계속 싸우도록 하였다. 우크라이나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이제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교전 당사자 양측 모두 전쟁 피로감이 누적되어 협상이 거론되고 있고 트럼프는 푸틴의 조건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즉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내 여전히 우크라이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북부 지역과 교환하고 전쟁을 끝내자는 이야기이다. 이런 조건은 우크라이나로서는 굴욕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우크라이나의 인적·물적 피해는 늘어나고 영토를 더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어떤가? 본토가 거의 공격을 받지 않고 전쟁이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지고 있으나 그간 러시아도 상당한 인적·물적 손실을 보았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명분이 이른바 ‘서방의 안보 위협’에 대한 예방적 대처라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안보 위협이 얼마나 감소하였는가? 이번 전쟁으로 그간 러시아에 중립적이었던 핀란드 그리고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함으로써 러시아의 안보 환경은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승리는 애초부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러시아의 성취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굳이 평가하자면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을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의 핍박에서 해방시켰고 국제사회에 러시아의 ‘맷집’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러시아의 가장 큰 실점은 어쨌든 우크라이나를 ‘침략’함으로써 스스로 ‘국가 브랜드’에 치명타를 가했다는 점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 제재에 참여한 국가는 소수이지만 유엔에서 절대 다수의 국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규탄하였다. 심지어 러시아 주도로 창설된 구소련 공화국들의 집단안보기구(CSTO) 회원국들 대부분이 파병은 고사하고 러시아에 대해 소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을 뿐이다. 러시아는 북한이 먼저 제의하였다고 하지만 북한에서 병력과 무기를 지원받은 것은 러시아의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다.
서방은 어떤가?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저렴한 에너지의 수입을 거부하는 등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를 스스로 단절함으로써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서방에 대해 호락호락하지 않은 푸틴이 통치하는 러시아를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의도를 갖고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떼어내려고 무리수를 두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느라 유럽 납세자들의 허리가 휘고 있다. 미국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때문에 이미 천문학적 수준의 적자에 시달리는 연방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고 ‘러시아 길들이기’에 실패하여 패권국으로서 위신에 금이 갔다. 전략적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밀착이 강화되어 미국의 양국에 대한 입지가 전쟁 전보다 약화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둘 다 슬라브 민족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외부 세력의 농간으로 전쟁의 수렁에 빠져 3년 넘게 허우적거리고 있다. 냉정히 평가하면 이번 전쟁은 러시아의 대우크라이나 외교의 ‘참담한 실패’와 서방의 대우크라이나 외교의 ‘눈부신 승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전쟁을 계속한다면 러시아가 입게 될 내상(內傷)도 상당할 것이며 지금까지의 인적·물적 손실만 해도 중장기적으로 러시아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위축시킬 것이다. 러시아는 영토가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시간대(time zone)가 무려 11개인 거대한 나라이다. 푸틴은 역사상 제국은 대부분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 요인에 의해 허물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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