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은 영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기업이 새로 생겨나고, 생(生)을 다하면 사라진다. 마치 인간 사회와 같다.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듯, 크고 작은 기업들이 모여 국가의 산업생태계를 형성한다. 건강한 생태계가 조성되려면 새로운 기업들이 꾸준히 등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생태계는 정체되고, 결국엔 국가의 미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벤처와 스타트업, 이 같은 신생 기업이 꾸준히 나오기 위해선 풍부한 자금이 있어야 한다. 인체로 치면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낼 '신선한 피'가 꾸준히 필요한 이치와 같다. 산업생태계를 풍성하게 만들 '신선한 피'를 공급하는 곳이 바로 벤처캐피털(VC)이다.
국내 VC업계에서 굵직한 이력을 남기고 있는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를 만나 최근 VC 동향과 벤처·스타트업 창업시장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윤 대표는 "이제는 자금이 고르게 흘러가는 시대가 아니다"며 "돈은 많지만 그 돈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고 최근 벤처투자 시장 트렌드를 설명했다. 그는 또 "VC의 본질은 산업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시장의 선구자"라고 정의하며 지금이야말로 VC 업계가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VC 생존전략? 확신 있는 기업에 집중"
최근 벤처투자 시장은 자산가치 급등과 과잉 유동성 속에서 구조적 변화를 맞고 있다. 투자금 자체는 여전히 풍부하다. 하지만 그 자금이 흘러가는 곳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윤 대표는 그 이유를 '극단적 효율화'라는 한 단어로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는 10개 기업에 투자해 2~3개만 성공하면 됐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는 생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윤 대표는 VC의 역할을 단순한 자금 공급자가 아니라 투자자가 납득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파트너라고 정의했다. 그는 "예전에는 씨앗을 뿌리듯 여러 기업에 투자한 뒤 기다리면 됐지만 지금은 투자 전 단계에서 훨씬 더 깊은 고민과 검증이 필요하다"며 "이제는 확신이 드는 소수 기업에 집중해야 하고, 앞으로 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윤 대표는 투자자 설득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에는 내부수익률(IRR) 7~8%만 보여도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며 "최소 20% 넘는 수익률 목표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실행력을 동시에 입증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티켓을 쉽게 내주던 시대는 끝났다"
윤 대표는 투자 방식의 변화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윤 대표는 "예전에는 기업이 뭔가를 시도할 수 있도록 '티켓'을 쉽게 줬다"며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자본이 효율적으로 쓰이지 않으면 티켓을 주지 않는 시대"라고 설명했다.그는 "예컨대 예전에는 5억원 정도를 먼저 투자해 놓고 지켜봤다면 지금은 1년 이상 기업을 관찰한 뒤 확신이 들면 50억원 이상을 한번에 투입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어 "인공지능(AI) 덕분에 창업자가 소수 인원으로도 효율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며 "처음부터 큰돈이 필요한 기업은 창업 자체가 어려워지고, 대신 소규모로 시작해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 대표는 최근 투자 사례로 블래스트의 '플레이브'를 언급했다. 그는 "블래스트는 원래 MBC 사내벤처에서 출발한 기술 기반 회사"라며 "가상 아이돌을 만드는 회사로 알려졌지만 본질은 센서 기반 인터페이스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블래스트는 가수의 움직임을 센서로 포착해 그래픽으로 구현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비대면 공연·게임 시장 확대와 맞물려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윤 대표는 "이처럼 사내벤처에서 독립해 나온 기업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최근 AI 열풍 속에서 벤처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짚었다. 그는 "AI를 구성하는 세 개의 축은 반도체·전기·데이터"라며 "반도체와 전기는 대기업의 영역이고, 벤처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특정 산업에 특화된 데이터, 즉 '버티컬 AI'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의료·법률·회계 등 산업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기업이 앞으로 유망할 것으로 내다봤다. 윤 대표는 "AI 시대의 승자는 결국 데이터를 어떻게 가공해 고객 문제를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VC는 '독이 든 성배'
윤 대표는 투자 심사 과정도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는 기업에 돈을 뿌려놓고 기도하듯 기다렸지만 이제는 최소 1년 이상 지켜본다"며 "기업의 계절별 실적, 대표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신뢰할 수 있는지 등을 꼼꼼히 보게 됐다"고 했다.그는 스타트업 대표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다음 달에 당장 돈이 필요해서 투자받으러 다니는 건 100% 실패한다"며 "투자가 필요하기 1~2년 전부터 VC와 관계를 맺고, 서로 성향과 철학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결국 VC와 스타트업은 동반자 관계"라고 말했다.
윤 대표는 벤처캐피털의 본질을 '독이 든 성배'라고 표현했다. 겉으로는 매력적이고 화려해 보이지만 동시에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산업이라는 뜻이다.
그는 "리스크를 관리하면서도 수익률을 내야 하는 구조 자체가 이미 모순"이라며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누군가는 그 성배를 마셔야 한다"고 표현했다.
윤 대표는 VC를 단순한 투자업이 아니라 자본시장과 혁신경제를 잇는 다리라고 정의했다. 윤 대표는 "벤처투자는 국가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만드는 일"이라며 "정부 정책과 민간 자본이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VC의 자리"라고 말했다.
윤 대표가 생각하는 좋은 VC의 기준은 명확하다. 그는 "산업 변화를 가장 빨리 읽는 사람이 좋은 VC"라며 "세상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기술과 자본이 어디서 만나는지를 보는 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VC의 매력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윤 대표는 "보통 나이가 들면 과거 지향적으로 변하지만 VC는 늘 새로운 트렌드를 좇아야 한다"며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젊게 살 수 있고, 늘 배우며 리프레시된다. 위험하지만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가장 먼저 목격할 수 있는 일이 바로 VC를 계속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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