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 만찬장.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중심으로 모인 인물들 사이로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테크 거물'들이 대거 포착됐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오픈AI의 그레그 브록먼,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 등 트럼프 행정부의 인공지능(AI) 구상을 뒷받침하는 핵심 기업 대표들이 총출동했다. 일본 측에서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사토 게이지 히타치제작소 사장이 동석해 무게감을 더했다. 이들이 모인 배경은 명확했다. AI 데이터센터용 전력 확보라는 미국의 절박한 과제에 일본의 자본력을 결합하는 실질적인 '딜(Deal)'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만찬의 화두는 단연 다카이치 총리가 들고 온 최대 730억 달러(약 11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2단계 합의안이었다. 이번 합의의 핵심은 히타치제작소와 GE베르노바가 주도하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건설에 최대 400억 달러를 투입하고, 주체가 공개되지 않은 펜실베이니아와 텍사스주의 가스 발전 프로젝트에도 총 330억 달러를 들여 AI 데이터센터용 전력을 공급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폭증하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발전소와 센터를 아예 한 부지에 묶는 '병설' 구조를 공식화한 것으로, 데이터센터 운영사가 생산된 전력을 전량 직접 인수하는 계약까지 이미 마무리된 상태다. 일본의 자본이 미국 AI 산업의 심장부를 돌리는 핵심 엔진 역할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양국의 기술과 자본이 에너지 인프라라는 실핏줄까지 공유하는 단계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이로써 일본은 지난 2월 360억 달러 규모의 1차 투자를 결정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추가로 '현찰 보따리'를 미국에 풀어놨다. 일본이 이토록 '폭주'에 가까운 속도전을 펴는 데는 그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다. 최근 미 연방대법원의 '상호 관세 무효' 판결이 났지만, 판결 대상에서 제외된 '자동차 관세' 위협에 노출된 일본만은 투자를 멈출 수 없는 처지다. 실제로 일본은 이번 합의로 총 1090억 달러의 투자를 확약하며 전체 약속액의 20%를 채웠다. 한국이 이제 막 실무 협의에 착수하고 EU가 내부 절차로 지연되는 사이 일본만 홀로 실행 단계까지 치고 나가는 형국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압박해온 호르무즈 해협 자위대 함선 파견 등 민감한 안보 현안을 회피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구마노 히데오 제일생명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회담에 대해 "경제 협력에 축을 둔 일본 정부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라며 "우려됐던 미국의 군사적 협력 요청이 전면에 나오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결국 일본은 11조 엔이라는 거액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헌법적 제약과 정치적 부담이 큰 '파견 압박'이라는 당장의 난제를 뒤로 미뤄둔 셈이다.
하지만 '안보를 현찰로 샀다'는 '경제 안보'라는 명분 아래 채산성 검토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11조 엔에 달하는 막대한 자본이 미국으로 쏠리면서 일본 내 투자가 위축되는 '산업 공동화'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번 투자의 핵심인 소형 모듈 원자로(SMR)는 아직 상용화 단계조차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다. 자칫 일본 기업들이 수익성 없는 사업에 자금을 쏟아붓는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실제 일본 메가뱅크 등 민간 금융권에서는 단기간에 집중된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두고 "채산성을 도외시한 무리한 베팅"이라며 차가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전기차(EV) 보조금 중단 사례처럼 향후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정책 기조 역시 잠복한 리스크다. 미국의 정책이 돌변할 경우, 전략적 파트너를 자처하며 거액을 베팅한 일본 기업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떠안게 된다. 결국 11조 엔의 투자는 당장의 외교적 안도를 샀을지언정, 일본 경제의 체력을 갉아먹는 '정치적 청구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일본 내부에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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