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의 영성(Spiritual Asia) ⑫]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 한 뿌리에서 갈라진 두 문명

  • 인도와 이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시작된 영성의 대서사시

인류 문명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전혀 다른 종교처럼 보이는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가 사실은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인도의 갠지스 강을 따라 발전했고, 다른 하나는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하나는 윤회와 해탈의 길을 걸었고, 다른 하나는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시작점에는 놀라울 만큼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인도와 이란을 별개의 문명권으로 생각하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수천 년 전 중앙아시아 초원과 카스피해 동쪽 지역에는 인도·이란계 아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언어도 비슷했고 신화도 비슷했으며 종교적 세계관도 상당 부분 공유했다. 훗날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도 문명을 형성했고, 또 다른 일부는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란 문명을 형성했다.

언어학자들은 오늘날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아베스타어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힌두교 경전인 베다와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아베스타에는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두 종교가 공통의 정신적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미지챗GPT 제작
이미지=챗GPT 제작


대표적인 사례가 우주 질서에 대한 개념이다. 힌두교 베다에는 ‘리타(Rta)’라는 말이 나온다. 리타는 우주를 움직이는 질서이며 진리이고 자연의 법칙이다. 태양이 떠오르고 계절이 바뀌며 인간이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역시 리타에 있다.

조로아스터교에는 ‘아샤(Asha)’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아샤 역시 진리이며 정의이고 우주를 움직이는 질서다. 의미와 역할이 놀라울 만큼 리타와 유사하다. 학자들은 이를 두 문명이 공유했던 가장 오래된 영적 유산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같은 강물을 서로 다른 바다로 흘려보낸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두 종교는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힌두교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Brahman)과 인간 내면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Atman)을 탐구하는 길로 나아갔다. 인간은 끊임없이 윤회하며 업(業)의 결과를 경험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을 통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탈(Moksha)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인도인들에게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순환이었다.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우주는 창조와 소멸을 되풀이한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었다.

반면 조로아스터교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조로아스터는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세계는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이었다. 인간의 선택은 중요하며 최후에는 정의가 승리한다고 믿었다.

시간은 원이 아니라 직선이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종교적 차이를 넘어 문명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힌두교가 인간 내면의 깨달음과 영적 완성을 강조했다면 조로아스터교는 사회적 정의와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다. 힌두교가 존재의 근원을 탐구했다면 조로아스터교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을 중시했다.

물론 양자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가깝다.

인도 문명은 인간 내면의 우주를 탐구했고 이란 문명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도덕적 실천을 강조했다. 하나는 명상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행동의 길이었다.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는 “너는 그것이다(Tat Tvam Asi)”라고 말한다. 인간 안에 우주의 진리가 있다는 뜻이다. 반면 조로아스터교는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강조한다. 진리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두 종교 모두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힌두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업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인간은 선과 악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두 종교 모두 인간을 운명의 노예로 보지 않았다.

인류 정신사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대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인간을 신들의 장난감처럼 보았다. 그러나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는 인간에게 책임과 자유를 동시에 부여했다. 인간은 단순히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훗날 불교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까지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조로아스터교와 힌두교를 비교하면 신들의 이름에서도 공통점이 나타난다. 인도에서는 데바(Deva)가 신을 뜻하는 긍정적 존재였지만, 이란에서는 다에바(Daeva)가 오히려 부정적 존재로 변했다. 반대로 인도에서는 아수라(Asura)가 악한 존재로 묘사되었지만,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후라(Ahura)가 최고의 신을 의미하게 되었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가족의 형제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출발점은 같지만 경험과 환경이 다르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인도는 갠지스 문명과 만나면서 영적 사색의 길을 더욱 깊게 걸었다. 이란은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시아 문명과 교류하면서 역사와 국가, 정의와 통치의 문제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도는 세계 최대의 종교 철학을 발전시켰고, 이란은 세계 최초 수준의 윤리적 일신교를 발전시켰다.

특히 조로아스터교는 후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천사와 악마, 최후 심판, 천국과 지옥, 메시아 사상 등은 훗날 서구 종교 세계관의 핵심이 된다.

반면 힌두교는 불교와 자이나교, 시크교를 낳으며 동양 영성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 세계 종교의 거대한 두 축은 어쩌면 이 지점에서 갈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는 인도에서 시작된 깨달음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이란에서 시작된 정의의 전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다.

현대 문명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인간 정신의 성숙 속도를 앞질러 버렸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지만, 무엇이 선한 일인지 판단하지는 못한다. 알고리즘은 효율을 높일 수 있지만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

이럴 때 힌두교는 인간 내면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진정한 우주는 우리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조로아스터교는 현실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라고 말한다. 좋은 생각과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라고 가르친다.

하나는 존재의 깊이를 묻고, 다른 하나는 삶의 방향을 묻는다.

그리고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둘 다일지 모른다.

생각 없는 행동은 위험하다. 행동 없는 깨달음은 공허하다. 내면의 성찰과 현실의 실천이 만날 때 비로소 문명은 건강하게 발전한다.

수천 년 전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는 오늘날 서로 다른 길 끝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 하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고, 다른 하나는 인간 행동의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그 두 질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시아의 위대한 영성 전통은 그 질문을 수천 년 동안 놓지 않았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역시 그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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