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고향사람들이 힘을 모아 나옹(懶翁)스님을 선양하다

원철 스님
[원철 스님]

 
경북 영덕은 오래 전부터 미식가들 사이에서 ‘대게의 고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요즈음 올레족들에게 ‘블루로드’라는 바닷길 코스는 걷기의 명소로써 각광을 받고 있다. 이와 더불어 웰니스(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 관광지를 표방하면서 지역의 브랜드 슬로건을 ‘맑은공기특별시’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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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병곡면에 위치한 S연수원/사진 필자 제공] 

 
현대적 의미의 ‘영덕 웰니스’ 시작은 2017년 병곡면에 위치한 S인력개발원 영덕연수원 건립에서 비롯되었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여기저기 많은 터를 물색한 후 이 자리를 낙점한 것은 명상센터를 운영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칠보산 자락에 안겨 있으면서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2025년 11월 하순, 그동안 말로만 듣던 그 연수원에서 1박2일 수행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미 직업(?)이 수행인지라 사실 수행보다는 시설과 운영방식 그리고 입지선정에 더욱 관심을 갖고서 살피는데 더 많은 비중을 두었던 기억까지 새록새록 일어난다.

 
지역사회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명상센터는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인구소멸지역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처방전으로 받아들였다. 지자체에서는 그 이듬 해인 2018년 창수면에 ‘인문힐링센터 여명’을 개원했다. S연수원보다 더 좋은 자리에 이미 일천년 전부터 자리잡았던 지역의 전통사찰 장육사 인근이 자연스럽게 선정되었다. 동쪽의 디귿(ㄷ)자형 큰 기와집과 서쪽의 일자형 기와집을 연결하는 작은 기와집 몇 채가 미음(ㅁ)자 형태로 연결되면서 강의동 숙소동 공양간 등등의 기능을 부여했다. 가운데 마당은 저절로 중정(中庭)이 되었다. 그 연륜도 벌써 8년을 넘겼다.
 
입지선정에는 역사성이 가장 우선되기 마련이다. 영덕이 낳은 최고의 선명상가 나옹혜근(1320~1376)왕사도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더불어 왕사의 이름을 붙인 공원과 교육관도 만들었다. 사찰을 중심으로 거대한 힐링단지가 조성된 것이다. 당나라 마조(馬祖 709~788)선사는 제자들에게 절대로 고향에 가지 말라고 당부한 바 있다. 하지만 나옹왕사는 고향에서 앞다투어 선양사업을 해주는 복덕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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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장육사 입구마을 공원에 조성된 후계먹과 나옹왕사 기념비/사진 필자 제공] 



뿐만 아니라 절 아랫동네 탄생지에도 반송정(盤松亭)이란 정자공원을 만들었다. 그 소나무는 왕사께서 출가하면서 기념식수 삼아 심어둔 지팡이였다고 한다. “나무가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줄 알라”고 하는 기념사까지 그대로 전해온다. 반송은 그 자리를 600여년 지키다가 1965년 수명을 다했다. 지역민들은 그 나무가 죽은 뒤에도 후계목을 심고서 그 자리를 지키도록 도왔다. 더불어 2008년 10월에는 다듬지 않는 잘 생긴 원석을 이용하여 나옹왕사 기념비를 세웠다. 문장은 인근 동네인 포항 기계면 출신이신 전 동국대 총장 지관(1932~2012) 대종사께서 지었다. 글씨는 이 지역이 배출한 유명 서예가 초당 이무호 거사가 썼다. 이번에 ‘인문힐링센터 여명’ 입구 대문 앞에서 현판식을 가진 ‘나옹왕사 선명상 치유센터’ 글씨 역시 선생의 작품이다. 영덕서각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암 심원섭 선생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나무판에 정성스럽게 새겼다. 그러고보니 고향의 인물들이 왕사를 알리고자 모두 힘을 모았던 것이다. 지역 불교계도 선명상 보급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두 팔을 걷어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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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상 치유센터 현판/사진 필자 제공] 
 
왕사는 중국 원(元)나라 유학승 출신이다. 1347년에 출국하여 1358년에 귀국했으니 십년 이상을 해외에서 머물렀다. 초기에는 인도 수행승인 지공(指空)화상에게 수학했다. 그 후에 강남지역의 선종사찰에서 머물고 있던 여러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명상법을 공부했다. 마침내 절강성 항주(杭州) 정자사(淨慈寺)에서 임제종 제18대 조사인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선사의 법맥(法脈)을 잇게 되었다. 몽산덕이(1231~1308)선사의 제자 밑에서 수행한 인연으로 인하여《몽산법어》를 편집하여 고려사회에 널리 알려 임제선종을 대중화했다. 저서로《나옹어록》을 남겼다. 공민왕(1330~1374)의 왕사로 활약했으며 으뜸제자는 조선개국의 공신 무학자초(1327~1405)대사라 하겠다. 이후 왕사의 제자들이 조선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왕사의 이름은 아원혜(牙元惠)이다. 아(牙)씨는 섬서성 함양(咸陽) 출신 이민자인 부친 아서구(牙瑞具)로부터 물러받은 성씨다. 요즘 말로 하면 화교2세인 셈이다. 어느 시대건 진취적이고 용감한 여성들은 있기 마련이다. 모친은 경남 영산(현 창녕)출신으로 외국인을 과감하게 신랑으로 선택할만큼 당찬 고려여성이었다. 연일(延日 현 포항) 정(鄭)씨 집안출신이며 금빛새가 낳은 알이 품에 안기는 태몽 후 나옹을 낳았다고 전한다. 여자는 이름조차 없었던 시절에 제자들은 어머니의 본관을 빼지 않고 기록하여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 어쨋거나 이런 혈연 때문에 원나라 유학시절에도 언어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선명상법을 높은 수준의 원어 이해력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글로벌 인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왕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노래의 작사가로도 유명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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