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에 대한 관심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종종 언급하면서 더 증폭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회만 있으면 "한국의 아이들은…", "한국의 학교는…" 하면서 미국의 열악한 공교육 현실과 비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자는 미국 교육의 열렬한 지지자다. 다른 나라 교육은 경험한 바 없어 한국과 미국만 비교하자면 한국은 사실 미국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바마가 한국과 비교한 미국의 교육은 대도시 다운타운 빈민가, 농촌·농장 지대 등 정말 열악한 교육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지역이 숫자로 표현되는 전체 평균을 내린다고 해도 뿌리가 다른 미국 교육은 경쟁만 부추기는 한국 교육과 비교가 될 수 없다.
교육 분야 자체를 놓고 비교를 하자면 정말 끝이 없기 때문에 이들 교육 과정을 마치고 나서 사회의 리더가 된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보자.
미국에서도 정치인들은 욕을 먹지만, 한 가지 한국 정치인들과 다른 점은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자에 대한 이들의 태도다. 미국에서도 동성애자는 전체 커플의 1% 남짓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은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결혼(안 되면 이에 준하는 법적 권리)을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동성애가 어떤 것인지도 잘 이해 못하는 사람으로서 정치인들의 이같은 노력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들은 소수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법이나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1%의 유권자가 이들에게 어떤 실익을 줄지 의문이다. 또한 이들이 정치헌금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나? 워싱턴 DC 인근의 한 지역에서는 최근 공화당 소속 의원이 "난 동성결혼을 지지하기 때문에 충분히 보수적이지 않은 것 같다"며 소수당 대표직을 내놓기도 했다.
리더가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지 않으면 '다수결에 의한 폭력', 아니면 '이권' 또는 개인의 '곤조'에 의한 정치가 되기 쉽다. 다수결도 소수의 목소리를 듣고 존중한 후 시행돼야 하고, 개인의 주관도 리더가 되려면 어느 정도 내려놔야 하는 것이 미국 사회의 분위기다. 오바마가 추켜세운 한국의 학교 교육을 받은 리더들을 잘 살펴보라. 학벌, 돈, 지위와 같은 사적 영역에서 성공한 이들이지, 결코 사회 공동체라는 공적 영역에서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들과 사회 일부가 양자를 혼동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이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남을 이기고 출세하는 법만 배웠지, 남의 이견이나 소수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종종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한국 국회의 폭력은 교육다운 교육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들의 불쌍한 작태라고도 할 수 있다.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지하철이나 공공시설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 어떤 한국 사람은 말한다. "차라리 장애인들한테 좋은 차를 한 대씩 사주는 게 예산이 덜 든다"고. 이는 최소의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와 이익을 보려는 기업의 의사결정 방식이지 가정, 커뮤니티, 더 나아가 국가가 건립되고 꾸려져 나가는 원리는 아니다. 소수 장애인들이 겪어야 할 심적, 물리적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발상이다.
한국이 점점 발전해 나가고 있지만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분위기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듯 하다. 누군가 억울한 목소리를 내면 이를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같이 찾아보는 모습, 바로 학교교육 현장에서 시작할 일이다. 또한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이 사회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제도와 관습, 법을 정비하는 것도 시급하다. 이렇게 발전한 사회는 뿌리가 굳건하고 오래갈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소외 계층이 얼마나 많은가.
오바마는 한국교육에 대해 문외한이다. 한국은 우쭐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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