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천하통일의 둥지를 틀다 |
1000여년전 조조가 건안문학을 읊으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역사의 거대한 흔적 속에 섰지만 언덕에서 바라본 드넓게 펼쳐진 평야는 온통 옥수수 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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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대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옥수수 밭 뿐이다. |
분명 당시는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냈으리라. 하지만 세상 부귀영화가 속절 없다는 말처럼, 조조의 그 화려했던 성들은 어느 사이엔가 기억 속 저편으로 멀리 몽환적 너울거림이 된 지 오래다.
사라진 업성 유지만큼 공허해진 마음 탓일까. 늦여름이 기승을 부릴 즈음에도 마음 한 켠은 드넓은 옥수수밭과 어우러져 초겨울의 가슴 시린 찬바람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그나마 뭉툭하게 솟아 남아있는 금봉대의 한 부분만이 그 화려했던 역사를 회고하는 응어리인 듯 묵직하게 다가왔다.
전각은 우뚝 치솟아 있고 (建高門之嵯峨兮)
두 개의 대궐은 푸른 하늘 위로 떠오른 듯하구나. (浮雙闕平太情)
화려한 궁궐 한복판에 서서 바라보니 (立中天之華觀兮)
구름다리가 서쪽까지 이어졌구나. (連飛閣平西城)
궁궐을 끼고 도는 장하(漳河)는 끝도 없이 이어져 흐르고(臨仰水之長流兮)
저 멀리 과수원에 알차게 여문 과일을 바라본다. (望園果之滋營)
… 조식(曹植) <동작대부(銅雀臺賦)> 中
관도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조조는 잇따라 원소의 근거지를 공격, 업성(鄴城)을 차지한다. 조조는 대량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화려한 누각과 궁궐을 짓는 등 신도시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곳을 천하통일의 둥지로 삼고 북방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도시로 발전시켜 나간다. 일부 사서에서 “조조의 근거지 업성이 당시 한 헌제가 머물던 도읍 쉬창(許昌)보다 더 크고 번성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황제를 끼고 한나라 조정을 장악한 조조. 그는 ‘황제’라는 칭호만 얻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인 황제나 다름없었다. 업성은 바로 조조가 패업의 야망을 불태우던 주요 활동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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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화려했던 업성(鄴城)의 모형도. 지금은 그 찬란했던 문명이 다 소실되고 금봉대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
△ 옥수수밭 속에 감춰진 옛 古都
취재진은 진시황의 아방궁만큼이나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는 조조의 업성 유적지를 찾아 한단(邯鄲) 린장(臨漳)현으로 향했다.
린장현 시내에서도 서남쪽으로 약 20km 가량 심하게 낡고 파인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면 양 옆으로 옥수수 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길에 흙과 자갈이 많아 차가 심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깔끔했던 차량이 비포장도로의 흙먼지를 뒤집어써 누렇게 변한 지 오래다. ‘이런 곳에 무슨 옛 휘황찬란했던 도읍지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려던 참에 차량이 멈춰 섰다.
업성 유적지 입구에 족히 15m는 돼 보이는 조조의 동상이 그나마 이곳이 옛 업성 유적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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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성 유적지 정문 뒤로 보이는 조조의 동상. |
가늘고 길게 찢어진 두 눈, 엷은 입술, 짙으나 숱이 많지 않은 수염, 특별히 빼어날 것 없는 생김새.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그대로다. 다만 허리 춤에 기다란 칼을 찬 채 정면을 바라보는 조조의 두 눈은 침입하는 적군을 살피기라도 하듯 날카롭기만 하다.
조조의 동상을 뒤로 한채 우리는 업성 유적지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과거로 성큼성큼 들어갈 것만 같은 그곳에 옛날 영화롭던 삼대는 무너져 흔적도 없다고 하니 탄식이 절로 새어 나온다. 육조고도(六朝古都)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웅장함은 온데간데 없고 옥수수밭 속에 간신히 그 흔적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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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대로 올라가는 계단. |
△ 과거의 화려한 위용
안내원은 “이곳은 조조가 위왕(魏王)으로 책봉받은 뒤 16년간 거주한 것으로 어찌 보면 쉬창보다 더욱 조조의 도읍지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곳은 이후에도 후조(後趙) 염위(冉魏) 전연(前燕) 동위(東魏) 북제(北齊)의 수도로써 약 370년간 6개 왕조의 도읍으로써 북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조조는 당시 도시를 건설할 때 화려한 궁궐뿐만 아니라 삼대(三臺)의 건설에도 매우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대란 조조가 지은 거대한 3개 누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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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대로 향하는 입구. 뒷편의 계단을 오르면 금봉대에 오를 수 있다. |
조조는 당시 이 곳 서쪽 성벽에 금봉대(金鳳臺), 동작대(銅雀臺), 빙정대(氷井臺)를 세웠다.
조조가 북방을 성공적으로 평정하고 기주로 돌아온 당시, 남쪽 땅 속에서 찬란한 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군사를 시켜 그곳을 파 보았더니 구리로 만든 동작새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를 기념키 위해 조조가 동작대를 만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곳은 왕실의 연회장소뿐만 아니라 성벽 수비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갖추어 조조 정치권력의 상징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각 누각의 높이가 금봉대와 빙정대가 24m, 중간의 동작대가 30m에 이르고 각 대마다 방이 100여칸씩 있었다고 전해지니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세 봉우리의 산과 같았으리라.
조조는 여기에 각 대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시키기도 분리시키기도 했다고 하니 가히 업성이‘난공불락의 인공 요새’라 불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훗날 수나라 양견이 누군가 이곳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업성을 흔적도 없이 몽땅 불태워 버렸을까?
△ 동작대를 바라보며
우리는 조조가 세웠다는 3개 누각 중 유일하게 그 터만 10m 가량 남아있었다는 금봉대에 올랐다.
금봉대는 본래 금호대(金虎臺)라고 불렸다. 그러나 후조(後趙) 3대 황제인 무제(武帝)의 이름인 석호(石虎)와 겹친다 하여 ‘호랑이 호’대신 ‘봉황 봉’을 따서 금봉대라 명명했다.
금봉대 위에 오르니 이 근처 마을이 한 눈에 쏙 들어온다. 곳곳에 촌락이 들어서 있고 옥수수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저 멀리 징주(京珠)고속도로 위에는 차들도 쌩쌩 달린다. 저 드넓은 땅 아래 어딘가에 과거 조조의 화려한 궁궐과 성벽이 파묻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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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대에 오르니 주변에 옥수수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
안내원은 “이 곳에서 60보 정도 걸어가면 동작대 옛 터가 나온다”며 지금은 겨우 3m 가량의 터만 남아 흙무더기밖에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과거 동작대에서 조조는 많은 문인들을 모아놓고 함께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예술을 즐겼다. 냉철하고 잔인하기만 한 조조의 또 다른 이면에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적 면모가 있었던 것.
당시 연이은 전쟁으로 중원이 어지럽던 시절 문인들은 조조 덕분에 이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고 덕분에 ‘건안문학(建安文學)’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나무에 가려 동작대의 흔적도 잘 보이지 않지만 당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포부를 잃지 않았던 영웅들의 그 기상과 정신만큼은 아직도 곳곳에 깊숙이 녹아있는 듯 했다.
△ 동작대, 적벽대전 발발의 원인?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업성의 옛 모습을 그려보며 한탄하고 있을 때 쯤 안내원은 “조조 세력을 쇠퇴하게 만든 적벽대전의 원인이 바로 저 동작대에서 시작됐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을 때 제갈량은 오 나라와 힘을 합쳐 조조를 공격하기 위해 당시 오 나라 장수인 주유를 자극하기 위해 꾀를 쓴다.
제갈량은 조조의 아들 조식이 지은 동작대부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해‘동서로 이어진 다리가 마치 하늘 위 무지개같다(连二桥于东西兮, 若长空之蝃蝀)’구절을 ‘동오의 교씨 자매를 품에 끌어안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기리라(揽二乔于东南兮,乐朝夕之与共)’로 절묘하게 바꿔 치기 한다.
여기서 말하는 두 교씨는 다름 아닌 손권과 주유의 아내인 대교(大乔)와 소교(小乔)를 가리킨 것. 이들 자매는 삼국시대 당시 천하 제일의 미색으로 손꼽히는 미녀로 조조마저도 군침을 흘릴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격분한 주유가 조조를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고 소설은 묘사한다.
안내원은 “물론 조조가 동작대를 완성한 것은 213년, 제갈량이 주유를 만난 것은 이보다 5년이나 앞선 208년으로 허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다만 소설 덕분에 이곳 동작대는 더욱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쓰기 훨씬 전인 당나라 때 시인 두목(杜牧)도 ‘동풍이 일어 주유를 돕지 않았더라면 깊은 봄날 교씨 자매는 동작대에 갇혀있었으리 东风不与周郎便,铜雀春深锁二乔’라는 시 구절을 읊었다.
조조가 교씨 자매를 얻기 위해 적벽대전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단순히 나관중의 소설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기가 막힌 상상력에 의해 꾸며낸 허구적 요소라기보다 수백 년 전부터 민간에서 내려오고 있는 전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조조, 위대한 도시설계가
양파껍질처럼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새로운 매력이 드러나 듯 업성 유적지에서 발견한 조조의 매력은 끝이 없다.
취재진은 조조가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 그리고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금으로 말하면 뛰어난 도시설계자였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업성은 크게 남북으로 나뉜다. 이 중 북쪽이 바로 조조가 이곳에 거주할 당시 세운 곳이다. 조조는 당시 이곳에 동서30km, 남북 20km 면적에 철저한 계획 도시를 세웠다.
동서를 가로질러 쭉 뻗은 넓은 대로를 축으로 도시 전체가 남북 대칭을 이뤘다. 북쪽에는 궁궐과 귀족거주지, 행정기관이 들어서고 남쪽에는 일반 백성들 거주지와 상업구, 수공업구가 몰려있는 등 각 구역을 나뉘어 설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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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화려했던 업성의 모형도. |
안내원은 “업성의 도시 설계는 향후 장안성과 자금성, 그리고 저 멀리 일본 나라궁의 구조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고대 건축사에 이정표를 남겼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훗날 수나라 양수가 업성을 불태운 데다가 장허(漳河)의 물이 범람하면서 조조의 휘황찬란한 업적과 함께 이 2000년 전의 고도는 땅 속에 영원히 파묻히고 만다.
그는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자들이 지난 28년간 업성 유적지 발굴 중에 있으며, 이곳 지하에는 업성 유적지가 그나마 잘 보존돼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땅 아래도 50cm만 파고 들어가면 성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다만 아직까지 이를 제대로 보존할 수 있는 기술력이 낮아 다시 파묻었다고 안내원은 덧붙였다.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 했던가. 업성 유적지를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과거 부귀영화를 자랑하던 옛 도읍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옥수수가 바람에 처량하게 흔들리며 약 2000년 전 업성의 흥망성쇠를 노래하고 있는 듯 해 가슴 한 켠이 아련하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은 조조를 ‘태평성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으로 묘사한다. ‘간웅’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후대에까지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영웅’ 조조. 이로 인해 그의 도읍 업성은 유비의 청두나 손권의 난징이 지금도 건재한 것과 달리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이 밖의 볼거리
* 조조가 말 매던 나무
업성유적지에서 옥수수밭과 흙 먼지를 뚫고 남쪽으로 약 5km 떨어져 있는 곳에는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측백나무 고목이 하나 있다. 과거 조조가 이곳에서 군사 훈련 당시 말을 묶엇던 곳이라 불리는 이 측백나무 앞에는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천하 제일의 측백나무(天下第一柏)’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높이 20m, 둘레 6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이 고목은 성인 4~5명이 팔로 안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 이 나무가 지켜온 세월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무성한 나무 가지가 만들어내는 쌍용(雙龍), 관음보살 등 갖가지 기이한 형상이 이 나무의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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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이 2000년의 세월을 껴 안으려는 듯 나무의 둘레가 얼마나 큰지 직접 체험하고 있다. |
*업성박물관
업성유적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업성박물관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10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현지 정부가 총 4100억 위안을 투자해 건설하는 업성 박물관은 총 4만㎡ 대지면적에 옛 도읍 고성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 눈길을 끈다. 완공이 되면 지난 2000년 간 육조고도로서 업성의 매력을 한층 더 발산시킬 터여서 이곳은 빼놓을 수 없는 삼국지 문화적 유적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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