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85>푸잉 – 굴기외교 주도하는 초원의 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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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11-0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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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지난해 1월 외교부 부부장에 푸잉(傅瑩)이 승진 임명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여성이 외교부 부부장에 임명된 것은 1974년 왕하이룽(王海容) 이래 36년 만의 일이었다. 게다가 푸잉은 한족 출신이 아닌 몽고족 출신이다. 인민일보는 당시 인사기사를 통해 푸잉 부부장을 ‘초원의 여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푸잉은 1953년 1월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퉁랴오(通遼)시에서 태어났다. 푸잉은 문화대혁명 시절 네이멍구의 건설병단(建設兵團) 산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다 공농병청강생 자격으로 1973년에 베이징 외국어대학에 입학해 영어를 전공했다. 영어성적이 빼어났던 그는 졸업 후 외교부로 배치받았으며 1978년부터 루마니아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1982년 귀국한 푸잉은 1990년까지 외교부 통역실의 고급통역사로 근무한다. 그는 덩샤오핑(鄧小平), 양상쿤(楊尙昆),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등 중국의 지도자가 외국 지도자와 회담을 할 때 통역을 도맡았다. 1984년 중국 건국 35주년 기념행사 때에는 행사 진행을 영어로 소개하는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뽑혀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올라가 덩샤오핑 바로 곁에서 행사를 지켜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985년에는 영국 켄트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한다. 이때부터 그는 통역사가 아닌 본격적인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90년 푸잉은 8년간 근무하던 번역실을 떠나 아주사(司)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부처장으로 2년간 일한 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유엔 캄보디아 임시기구에 파견되어 근무했다. 1993년에 아주사로 복귀해 1997년까지 처장으로 활동했으며 이어 공사참사관으로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파견됐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필리핀 대사에 임명됐다. 소수민족 여성이 대사직에 오른 것은 최초였다.

2000년에 귀국한 그는 아주사 사장에 임명됐다. 그가 아주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기간에 동티모르 사태와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터졌다. 또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길을 연 북-미-중 3자회담도 그가 아주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3년에 열렸다.

아주사 사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푸잉은 호주 대사로 3년을 재직한 뒤 2006년에는 영국대사로 전임됐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 대사가 되면서 푸잉이 왕하이룽(王海容)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외교부 부부장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푸잉은 영국대사로서 영국 주류사회에 파고 들었다. 주요 언론매체의 인터뷰 요청에 적극 응하였는가 하면 직접 기고를 하기도 했다. 2008년 3월 티베트 유혈시위가 벌어지자 영국에는 중국을 비난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푸잉은 영국의 주류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입장과 논리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언론매체에 ‘만일 서방이 티베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이라는 기고를 하기도 했다.
딸 하나를 두고 있으며 골프가 보기 플레이어인 푸잉은 논리가 정연하지만 항상 상냥함을 잃지 않는 여성다움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녀는 몽고족 고유의 우유차를 마시고 몽고의 흥겨운 민요를 즐겨 듣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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