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대신 촉을 맡은 장완의 묘
서산 산기슭에 위치한 팔격형 모양의 장완의 묘. |
부락산의 웅장함에 비해 장완의 묘는 너무도 작고 초라했다. 그도 그럴것이 부락산은 촉 건국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땅이요, 떠돌이 유비에게 정착과 안정을 준 기회의 땅이었지만 장완의 묘는 쇠락해 가는 촉을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이 서려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장완은 유비가 촉에 입성했을 때 형주서좌로 수행했습니다. 이후 현의 작은 관리인 '광도현의 장'이라는 직책에 임명됐지만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벼슬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지요. 유비가 일찍이 유람을 하다가 갑자기 광도현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장완이 일을 하지 않고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노여워하며 처벌하려고 했는데 이를 제갈량이 말렸씁니다. 방통과 마찬가지로 장완 역시 작은 현의 관리로 끝날 수 없는 인물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지요.”외진 장완의 묘 위치만큼 취재팀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장완을 설명하기 위해 안내원의 말이 분주하다.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처리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외양을 장식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는 다시 살펴 주십시오.” 제갈량이 유비에게 전하는 간청이 들리는 듯 하다.
유비는 제갈량의 말을 들어 장완을 벌하지 않고 관직을 박탈하는 것으로 죄를 낮췄다. 나중에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장완은 중앙에 들어가 상서랑으로 임명된다.
제갈량에 이어 촉의 승상이 된 장완의 동상. |
◆ 죽음을 앞둔 제갈량 장완에게 촉을 맞기다.
제갈량은 234년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 자신의 후임자로 장완과 비의를 지명한다. 장완은 제갈량이 한중에서 북벌에 매진할 때 식량과 병사를 공급하는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한 인물이었다. 제갈량은 장완의 면면을 보고 충성과 고아함을 두루 갖추고 있어 나와 함께 능히 제왕의 대업을 도울 사람이라고 평했다.
제갈량의 죽음은 촉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제갈량이라는 위대한 참모가 있었기에 방랑하던 일개 유협집단이 국가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우했던 유년 시기를 지나 한낮 시골 서생에 불과했던 제갈량, 유비를 만나 세상에 나와 세상을 떠나날 때까지도 온몸을 다 받쳐 유비의 유지를 받들고 나라를 돌봤던 그였기에 그 공백은 너무나 클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복받친다. 자신을 알아줬던 주군이 떠난 자리 주군의 유지를 받들며 초조하게 걱정과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맞이했던 제갈량의 심정이 얼만나 힘들고 괴로웠을지, 천하제일의 군사 제갈량을 잃고 그 후임으로 촉나라의 운명을 짊어 지게된 장완의 부담은 또한 얼마나 막막하고 힘겨웠을까...
분묘 앞 계단을 내려가자 장완과 관련된 유물이 보관된 사당과 그 사당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한 장완의 상이 취재팀을 맞이 한다. 부락산에서 본 촉한사영(蜀漢四英)의 모습과 달리 혼자 서산 산기슭을 바라보며 서있는 장완 상의 모습이 안내원의 사연과 어우러져 더욱 애처롭게 보인다.
제갈량이 죽자 장완은 근심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조정을 진정시켰다. 제갈량을 잃은 슬픔도 감췄다. 장완은 제갈량만큼 그룻이 크지는않았지만 냉정했다. 이러한 성격으로 매사를 견실하게 추진했고 그로인해 인망을 얻었다.
장완 사당의 내부 모습, 제갈량의 죽음에서부터 장완이 펼치고자했던 상용기습계책을 논하는 내용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
◆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했던 장완
장완에 대해서 취재팀이 묻자 안내원이 한마디로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행동할 줄 아는 인물입니다."
그와 관련된 간략한 일화를 안내원이 풀어낸다.
"어느 날 독농(督農) 양민(楊敏)이 장완을 이렇게 비방한 적이 있어습니다. "장완은 일하는 것이 모호하여 진실로 이전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주변 사람들이 양민의 말을 장완에게 전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양민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했으나 장완은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나는 확실히 이전 사람만 못하므로 추궁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후에 양민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사람들은 양민이 반드시 죽게 될거라며 지레짐작 했습니다. 그러나 장완은 사사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심없이 양민을 판결하여 양민은 중죄를 면했다고 합니다."
장완은 사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업무를 저버리는 그릇된 행동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 장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238년. 요동에 근거지를 둔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가 요동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키자 장완은 한중으로 출병했다. 그리고 한수(漢水)와 면수(沔水)를 타고 형주 북부의 요충지인 상용(上庸)과 위흥(魏興)을 습격할 상용기습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촉의 수뇌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장완은 열병에 걸려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다.
사당안으로 들어가니 제갈량의 죽음에서부터 장완이 펼치고자했던 상용기습계책을 논하는 내용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그림과 사당 중앙에 휭하니 놓여있는 향그릇 만이 이곳이 사당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장완은 도량이 넓고 솔직하며 조용한 인품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품에 제갈량은 끝없는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장완은 부드러울뿐 카리스마가 없었다. 부드러운 리더십은 비상시 정국을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장완이 내놓은 상용기습계책이 수뇌부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것도 그의 성격을 간파한 익주출신 신하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미 국가를 위해 싸울 의향이 없는 촉에서 장완은 속절없이 가슴만 쓸어내려야했다. 이런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일까, 장완의 묘는 너무나 교요하고 쓸쓸했다.
해가 서산에 기운지도 한참, 시간이 많이 늦은 탓에 장완의 묘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이 사방을 암흑으로 감싼다. 제갈량의 뜻을 받들지 못한 데 따른 고뇌와 제갈량에 대한 장완의 그리운 마음이 감싸고 도는 듯 봉분 주변으로 무거운 적막감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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