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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삼국지기행 20 안후이성편> 4-1 고향에 남긴 걸작, 조조의 ‘지하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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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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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화조암(華祖庵)과 화희루(花戱樓)를 둘러본 우리 '걸어서 삼국지기행' 취재팀은 조조의 고향 유적지를 찾아 발길을 재촉했다.

위(魏)의 전략적 요충지인 허페이(合肥)시에서 조조의 고향이라는 보저우(亳州)까지 왔지만 지금까지 둘러 본 유적들은 오랜 세월 속에 원래의 모습을 잃었거나 조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여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보저우 시가지로 들어서니 ‘위무(魏武)광장’이라는 푯말과 함께 같은 글자가 적힌 길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위무는 조조의 시호(諡號)로, 생전 황위에 오르지 않았던 조조는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조비(曺丕)에 의해 위무제(魏武帝)로 추존됐다. 그제서야 비로소 조조에게 한발자국 가깝게 다가선 기분이었다.

“조조의 고향이면 생가의 흔적이 남아있을 법한데, 어디에 있죠?” 취재진이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안타깝게도 “이징메이요우러(已经没有了 없어졌어요)”였다. “보저우시 중심에서 차로 10여분 떨어진 곳에 조씨 집성촌 차오위안(曺園)촌이 있습니다. 조조의 생가(曺操故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지금은 평범한 마을로 변했습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안내원이 설명했다.

후한(後漢) 말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면서 정치의 중심에 부상한 조조는 동탁이 죽은 뒤 후한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손권의 오(吳), 유비의 촉(蜀)과 함께 삼국시대가 열리고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면서도 조조는 고향을 잊지 않았다.

안내원은 조조가 기운이 쇠할 때나 새로운 구상이 필요할 때면 자주 고향을 찾아 심신을 위로했다고 취재진에게 들려줬다. 하지만 취재진이 기대했던 조조 고향과 생가의 자취는 두번 가까운 밀레니엄이 바뀌는 세월속에 모습을 감춰버렸는지 지금은 현대식 마을만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불현듯 앞서 들른 관우의 고향이 생각났다. 엄청난 규모의 관우상에다 생가와 관제묘(關帝廟) 등 관우의 고향 윈청(運城)의 요란한 '관우 사랑'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비록 생가는 사라졌지만 보저우에는 조조의 걸작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곧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원의 힘있는 목소리에 취재팀의 귀가 열리고 눈이 반짝였다.

땅 속 운병도의 환기를 위해 지상과 연결해 놓은 환기구의 모습.


번잡한 시내 한 복판에 이르러 차가 멈췄다. 직선으로 뻗은 인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안내원이 길 가의 솟은 네모난 기둥 같은 것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조조의 지하운병도(地下運兵道)의 환기구입니다.”

189년 뤄양(洛陽)궁에 입성 해 권력을 휘어잡은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하고 9세의 진류왕(陳留王)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리고 동탁 스스로는 태위(太尉)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온갖 횡포를 일삼았다. 얼마 못 가 동탁의 전횡을 견디다 못한 각국의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 동탁을 압박하자 동탁은 뤄양궁을 불태워버리고 어린 황제를 앞세워 창안(長安)천도를 감행한다.

조조는 동탁을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각자의 잇속을 챙기기 급급했던 제후들은 조조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제후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동탁의 뒤를 쫓지만 결과는 조조의 참패.

낙담한 조조는 고향으로 돌아와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수적으로나 전술로나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때 만든 것이 바로 지하운병도.

땅굴을 파 사방으로 길을 내고 군사들로 하여금 성 안팎으로 연결된 지하통로를 통해 반복해서 들고 나게 했다. 지하 상황까지 알 수 없는 적군들의 눈에는 적은 수의 군대도 수만 대군으로 비춰질 수 있는 대단한 전략이었다.
지하운병도를 이용해 적군의 눈을 속이며 조조는 점차 세를 확장해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권력의 축은 조조에게로 옮겨왔다.

취재팀이 길 위에서 확인한 환기구는 바로 운병도 조성 당시 공기 순환을 위해 설치해 놓은 ‘숨 구멍’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 자리에 남아있었던 건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지하운병도 매표소로 들어가는 입구.


환기구 앞 건물들 사이에 지하운병도로 들어가는 매표소가 있었다. 매표소 입구에는 한자 ‘조(曺)’자가 적힌 깃발이 걸려있었다.

1900년 전 만들어진 지하 요새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하운병도는 지하 2~5m깊이에 만들어졌으며 총 길이가 무려 8km에 달해 지하장성(地下長城)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방금 전 차에서 내려 걸어온 길 아래로 운병도가 뻗어있습니다.” 운병도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안내원이 설명했다.

지하운병도 내부 구조도.


8km 운병도 중 외부에 공개된 것은 800m. 전체의 십 분의 일에 불과한 구간이었지만 운병도의 가치는 확연히 드러났다.



희미한 불빛에 의존해 컴컴한 운병도 내부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 이어졌다. 단행도(單行道)였다.

단행도.




단행도를 따라 걸어가다가 머리를 숙이라는 안내원의 소리가 울렸다. 천장의 높이가 구간 마다 달랐던 것.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마련한 첫 번째 장애물이다.

천정 높이를 다르게 만든 첫번째 장애물.


다시 안으로 향하니 이번에는 아래와 위로 길이 나뉘어졌다. 취재팀 중 일부는 위로 난 길로, 일부는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걸었는데 어느 샌가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군사를 신속하게 투입할 때 쓰기 위한 통로다.

상하단행도.




운병도 내부 통로는 평행단행도(平行單行道)와 상하단행도(上下單行道), 이인도(雙人道, 두 명이 지나갈 수 있는 길), 순환도(循環道) 4가지로 나뉜다.

평행단행도와 상하단행도, 이인도를 지나자 왼쪽으로 작은 공간이 보였다. 군사들이 급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자 방금 전 지상에서 보았던 환기구가 연결된 곳이었다.

잠시 후에는 안내원이 ‘함정’이라며 다시 취재팀을 불러 세웠다. 깜깜한 내부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땅 위로 올라와 안내도를 확인하니 날카로운 쇠가시로 가득한 함정이었다. 내부 구조를 모르는 적군이 길을 따라 무조건 쫓다 보면 이 무시무시한 가시밭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목적에 따라 설치해 놓은 함정과 장애물을 설치하기 위해 발목 위치에 파놓은 홈, 무기 저장고까지 조조의 치밀함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조조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며 취재팀이 역사의 현장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문명의 발전과 단절된 듯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지하운병도는 조조의 지략(智略)과 용병술이 최대로 발휘된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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