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인사로 인해 중국 언론들은 광둥성 대리성장에 임명된 주샤오단에 스폿라이트를 집중시켰다. 주 대리성장은 2012년 2월 광둥성 인민대표대회에서 정식 성장으로 선출될 예정이다. 광둥성 1인자인 왕양(汪洋) 당서기는 2011년 11월 주 대리성장의 ‘데뷔’ 무대였던 광둥경제발전국제자문회의에서 큰 소리로 그의 업적을 칭찬해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주 대리성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끈끈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후 주석이 직접 그의 근황을 챙기고 있다는 소문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국가주석직에 취임한 후 얼마되지 않은 2003년 4월 사스 퇴치 문제로 광둥성을 시찰했을 때의 일이다. 장더장(張德江, 현 부총리) 당시 광둥성 서기와 황화화 성장 등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후 주석은 주샤오단을 거론하며 “샤오단 동지는 어디 있는가”라고 물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시 광둥성 통일전선부장에 머물러 있던 주 대리성장은 이후 성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 광저우시 당서기, 부성장 등으로 승승장구했고, 결국 성 정부의 수장 자리까지 올랐다. 왕 서기와 황 성장 등이 모두 공청단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순탄한 승진을 가능케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중국 언론들이 이런 배경 탓에 그를 주목하고 있지만 악화된 광둥성 경제가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실제 그는 대리성장에 임명된 후 “수출이 크게 악화돼 2008년 못잖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올해는 중국의 수출이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수출대성인 광둥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주샤오단의 리더십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
주샤오단은 1953년1월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에서 당 간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샤오단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18세에 공청단과 인연을 맺은 후 16년동안 공청단에서 근무했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1년 광둥성 악기창에서 공장근로자로 재직할 때 그는 공청단 지부 서기에 오르면서 공청단 인생을 시작한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후 1977년 주샤오단은 공청단 광저우시 위원회로 이동해 갔으며 이후 판공청 주임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1982년에 광저우시 공청단 부서기로 승진했고 2년후인 1984년에는 공청단 광저우시 서기로 승진했다. 당시 공청단 중앙에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해 왕자오궈(王兆國)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등이 포진해 있었다. 공청단의 젊은 간부로서 주샤오단은 중앙의 기라성같은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주샤오단은 광둥성의 이론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광둥의 4대재자(四大才子) 중 으뜸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었다. 광둥 4대재자 중 나머지 세명은 선전(深圳)시 시장과 산시(山西)성 성장을 역임한 후 현재 국무원 남수북조팀의 부주임인 위여우쥔(于幼軍), 광저우시 선전부 부부장을 역임하다 비리혐의로 1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인 리위안장(黎元江), 광둥성 문화청장인 차오춘량(曹春亮) 등이다.
후야오방(胡耀邦)이 실각하던 1987년 주샤오단은 공청단을 벗어나 광저우시 총화(從化)현 서기로 옮겨갔다. 이 곳에서 4년을 근무했다. 1991년 주샤오단은 광저우시 부비서장으로 승진했으며, 광저우시 상무위원으로 승진해 선전부장에 발탁됐다. 1996년에는 광저우시 부서기에 올라섰다.
후진타오가 공산당 총서기에 올라선 2002년 그는 광둥성으로 이동해가서 통일전선부 부장, 성 정협 부주석을 거친 후 2004년 광둥성 선전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2006년 그는 10년전에 근무하던 곳인 광저우시 서기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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