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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삼국지 기행 허난성편 40> 8. 관우, 낙양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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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15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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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김효인 기자) 뤄양(洛陽,낙양)은 중국의 7대 고도 중 하나이자 황허(黃河)문명의 발상지로서 하(夏), 은(殷), 주(周) 시대부터 당(唐)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속의 수 많은 국가들의 도읍이었다. 취재팀은 삼국지의 맹장 관우(關羽)의 숨결을 찾아 낙양의 ‘관림(關林)’으로 향했다.

취재팀이 낙양 시내 호텔에서 출발하여 관림을 향하던 길에 차창 밖을 내다보니 대형상가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취재팀과 동행한 가이드는 “낙양은 황하강 중류에 위치하여 물자유통의 중심지로 상업이 특히 발달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삼국지 시대는 물론 옛날부터 이 곳에 갑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라고 설명했다.

차로 약 1시간여를 달렸을까, 어느덧 우리 일행은 관림에 도착했다. 관림 앞에 조성돼 있는 넓은 공원에서 낙양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동네 노인들이 중국 전통악기인 얼후(二胡)를 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가슴을 저미는 얼후의 슬픈 가락이 마치 이 곳에 잠든 관우의 혼을 위로하는 듯 했다.

관림 앞에 당도하니 안내원은 우선 관우의 머리가 관림에 묻히게 된 사연에 대해 들려줬다.

“당시 관우를 죽이고 형주(荆州)를 차지한 손권(孫權)은 여몽(呂蒙)의 공로를 치하하고자 큰 연회를 열었습니다다. 그런데 갑자기 연회에서 여몽이 손권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나를 알아보겠느냐? 나는 관운장이다’라고 위협했습니다. 여몽의 몸속으로 관우의 혼령이 들어간 것이죠. 깜짝 놀란 손권은 당시 문무백관과 함께 정중하게 절을 하자 관우의 혼령이 나가면서 여몽이 피를 쏟아내며 죽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손권은 관우를 죽인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책임을 조조(曹操)에게 떠넘기고자 관우의 수급을 낙양에 있던 조조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조조는 유비(劉備)의 분노를 자신에게 돌리려는 손권의 음모를 간파하고 나무로 몸을 만들어 제후의 예로 장사를 지낸 뒤 낙양성 남쪽인 현재의 관림에 묻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중국은 ‘頭忱洛陽(두천낙양), 身困當陽(신곤당양)’ 이라고 하지요. 관우의 수급은 허난성(河南省) 낙양에, 몸은 후베이성(湖北省) 당양에 묻혀있다는 뜻입니다.”

촉한(蜀漢)에서 크나큰 활약을 한 관우. 하지만 그의 머리와 몸은 죽어서도 자신의 고향인 산시성(山西省)도, 유비가 있던 곳도 아닌 손권과 조조의 지역에 묻히게 됐다.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형제로서 유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그리고 관우를 잃은 유비가 평정심을 잃고 신하들의 간언에도 오(吳)나라를 공격한 마음이 이해가 됐다.


관림 입구에 들어서니 왼쪽에는 관우의 충절을 나타내는 시죽도(詩竹圖) 조각과 오른쪽에는 관우의 모습을 새긴 조각이 양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입구에 황금색 글씨로 적힌 관림이라는 글자를 보니 왜 관림이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일반인의 묘는 분(墳), 왕과 제후의 묘는 총(塚), 황제의 묘는 릉(陵)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보다 높은 것은 바로 성인으로 성인의 묘는 림(林)이라고 합니다. 관우는 남북조 시기부터 청(淸)나라 말기까지 역대 왕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후(侯)에서 왕(王)으로, 왕에서 제(帝)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문성(文聖)으로 공자를, 무성(武聖)으로 관우를 모시면서 관림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삼국지의 수많은 인물들은 18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잊혀져 갔지만 관우만은 사람들에게 공자와 같은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었다.


관우상을 모신 사당 앞에는 200년 된 측백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 하나씩 서 있었다. 안내원은 이 두 나무가 봉황의 머리와 꼬리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나서 보니 한쪽의 나무 가지는 봉황 머리를 하고 있었고 반대쪽 뿌리부분은 마치 봉황의 꼬리처럼 넓게 퍼져있었다.

취재팀은 이어 거대한 관우상이 모셔져 있는 사당 앞에 당도했다. 사당 입구에는 서태후(西太后) 가 썼다는 기장숭고(氣壯嵩高)라는 기운이 숭산의 높이만큼 높다라는 의미의 편액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한켠에 있는 큰 옥석이 눈길을 끌었다. 안내원은 “이 옥석은‘관성제군의 옥’이라는 이름의 옥새로 푸뉴(伏牛)산의 이허(伊河)에서 나온 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무게도 1.8t이나 되서 사람들은‘세계 최고의 옥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관우가 제왕의 정복에 쓰는 면류관(冕旒冠)쓴 모습. 안내원에 의하면 면류관을 장식한 구슬의 갯수가 12개로 이는 곧 제왕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사당안에 들어서니 관우는 제왕의 모습으로 왼쪽에는 요화(廖化), 주창(周倉)이 오른쪽에는 왕보(王甫), 관평(關平)이 위치하고 있었다. 평일 낮 시간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 제를 올리고 있었다. 어떤 소원을 비는지 궁금하여 제를 올리던 한 여인에게 물어보니 아주머니는 “정저우(鄭州)에서 장사를 하는데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중국에서 관우는 재물신으로 모셔집니다. 그렇기에 저 같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 곳에 와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빌지요”라고 말했다.

관우는 삼국지에서 군주도 아니고 장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장군에 불과했던 그는 어떻게 중국 사람들에게 재신(財神), 즉 재물의 신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을까? 안내원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명청시대가 되자 상업이 급격히 발전하게 됐다. 이 때 당시 관우의 고향인 산시성은 고지대에 위치해 농산물의 생산이 여의치 않아서 일찍이 다른 지역과의 상업이 발달했다. 특히, 산시성에는 중국 최대의 염호(塩湖)인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다.

산시성 상인들은 소금을 팔기위해 먼 길을 떠날 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신이 필요했다. 당시 상인들은 의리와 신용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있었는데 관우는 이를 모두 갖추고 있어 상인들은 관우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우를 신으로 모신 산시성의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자 전국에 부자가 되고자 했던 상인들은 산시성 상인들을 따라 관우를 신으로 모시면서 중국에서 관우는 재물신이 됐다는 것이다.



관우상을 끼고 내부로 좀 더 들어가니 관우가 신으로 된 뒤의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벽화에는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그의 부장들과 함께 신이 되어 하늘을 나는 모습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관우상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조명이 켜져있는 것도 있고 꺼져 있는 것도 있어서 그 연유가 궁금했다. 알고보니 관림에서 이 관우상을 일반인에게 돈을 받고 분양하는 것이었다. 절반이상의 관우상들에 조명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관우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느낄 수 있었다.

재신(財神)으로 모셔지는 관우의 모습. 왼쪽 공자가 든 저울은 공평함을 오른쪽 공자가 든 칼은 신의를 상징한다고 한다.

관우 사당을 뒤로하고 취재팀은 관우가 재신(財神)으로 모셔진 또 다른 사당으로 향했다. 방금 사당과 다른 점은 관우상 앞에 두 공자가 서 있는 것이였다. 한 공자는 저울을 다른 공자는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안내원은 칼은 신의를, 저울은 공평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이어서 곧 관운장의 부인을 모신 냥냥뎬(娘娘澱,낭낭전)으로 향했다. 안내원은 “관운장의 부인은 후(胡)씨로 의술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 있는 사람들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이 곳에 와서 빌고 가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관우묘 앞에 있는 2개의 패방. 앞에 세워진 한수정후묘(漢壽亭侯墓)라고 적힌 패방은 명나라 때, 뒤에 '관우의 수급(首及)이 이곳에 묻혀있다'라는 의미의 중앙완자이(中央宛在)라고 적힌 것은 청나라 때 각각 세워졌다.

취재팀은 곧 관우의 수급(首及)이 모셔져 있는 관우묘에 도착했다. 이 관우 묘의 면적은 2600 ㎡, 높이 6m로 청나라 시대 때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묘 앞에는 충효나 절의를 지킨 사람을 위해 세우는 패방(牌坊) 2개가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명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관우가 생전에 조조에게 받았던 한수정후(漢壽亭侯)라는 것을 알리는 한수정후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 뒤로는 청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관운장의 수급이 이곳에 묻혀져있다라는 뜻의 중앙완자이(中央宛在)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관우묘비석. 청나라 강희제 때는 충의신무(忠義信武) 관성대제(關聖大帝) 여덟글자만 있었으나 이후 청나라 황제들이 글자를 추가하면서 총 15글자로 늘어나게됐다.

그리고 관우의 묘비에는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관성대제림(忠義信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林)’ 이라고 쓰여있었다. 가이드는 “이 비석은 청나라 강희(康熙)제 때 세워진 것인데 이후 원래는 충의신무 관성대제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후의 약 16여년에 걸쳐 옹정(雍正)제, 건륭(乾隆)제, 가경(嘉慶)제, 도광(道光)제가 여기에 글자를 추가로 새기면서 지금의 이 글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묘비를 둘러싼 이 구조물은 모두 나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나무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어 결합되어 있습니다.” 라고 설명했다.

가이드는 하루에 약 1000명의 사람들이 관우의 자취를 찾아 이 곳 관림을 방문하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의 인물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우는 18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으며 공자 반열의 성인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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