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섬서성편> 6. 오장원에 진 큰 별,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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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3-0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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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정수영 기자) 한중시 면현에서 삼국지 유적지를 둘러본 취재진은 다음날 아침 일찍 오장원(五丈原)으로 향했다. 오장원은 산시(陝西)성 면현 남서쪽에 자리잡은 보계시에 위치한다. 면현에서 보계까지는 3시간 반 정도가 소요됐다. 보계시의 기산현(岐山县) 현성(县城) 남쪽 20㎞ 지점에 위치한 오장원은 해발고도 650m의 구릉이다.

1700년전인 234년 제갈량은 이곳에서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魏)나라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장기전을 펼쳤으나 54세로 병사했다. 촉한의 군대는 제갈 량의 유언에 따라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대오를 정비해 퇴각하다가 사마의가 추적하자 반격에 나섰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살아 있는 줄 알고 도망쳤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패주시켰다(死諸葛走生仲達)’는 고사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오장원은 평면도로 보면 비파 모양인데, 비파의 목 부분처럼 생긴 곳이 5장(5丈=15m) 정도여서 ‘오장원’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길이는 남북으로는 길게 3.5km, 동서로는 짧게 1.5km 규모다.

현재의 오장원은 1200년전 당나라 때 만들었으나 허물어져 300여년전 청나라 때 새로 보수한 것이다. 사당은 마을 사람들이 돈을 거둬 만든 것이어서 규모가 크진 않다.

사당 안으로 들어가면 마대와 위연이 선봉대장인 제갈량을 양 옆에서 지키고 서 있다. 마당에는 동편엔 종루(鐘樓), 서편엔 고루(鼓樓)가 있는데 사당마다 종루가 있어 아침마다 두드리면 사무가 시작되고, 저녁에 고루에서 북을 두드리면 하루 일이 끝났다고 한다.

보통 다른 사당은 오른편(동편)에 고루, 왼편(서편)에 종루가 위치한다. 보통 사당 문 만들 때 남쪽에 문을 만들고, 북쪽을 닫히게 하기 때문이다. 오장원에만 유일하게 거꾸로 달렸는데, 이곳은 전쟁터가 앞이라 문을 북쪽으로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당 한켠에는 세개의 줄기가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뭉쳐 있는 회나무가 굵은 둥지를 튼 채 서 있다. 이는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른데, 어떤 이는 유비, 관우, 장비의 결의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설명한다. 삼국시대가 3개의 나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결국 합쳐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당 앞쪽에 있는 제단에는 16.2m의 오장으로 된 나무 기둥이 서 있다. 한개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나무는 아주 희귀한데, 제갈량 역시 ‘세상에서 찾기 힘든 인재’라는 의미에서 기둥을 제갈량과 동일시 한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오장원 안에도 무후묘에서 봤던 악비가 쓴 출사표가 양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 출사표는 제갈량이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날 때 임금 유선에게 올린 글을 말한다. 사당에는 팔괘진(八卦陳)과 팔괘정(八卦亭)도 눈길을 끈다.

소설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사마의와 전투를 하면서 진법으로 대결한 것이 나온다. 제갈량은 팔괘진(八卦陳)을 펼쳤고, 사마의 군사가 이를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한 채 오히려 70~80%의 군사를 잃었다고 한다.

팔괘정은 제갈량이 발명한 팔괘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8각으로 만든 정자다. 팔괘진은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팔괘의 원리를 사용했다는데, 자세한 건 오늘날에도 전해진 게 없다. 사당 한쪽에 만들어진 팔괘진이란 방으로 들어가니 조그만 미로의 방으로 나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제갈량이 이런 진법으로 사마의 군대를 대파했다고 하니 실제로는 어떠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오장원 동상은 다른 사당에 있는 것들과 약간 다르다. 이 곳에 있는 조각상은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인데, 제갈량이 죽기 바로 직전 모습을 담아 병든 얼굴에 눈망울이 쳐져 힘든 상황임을 묘사했다고 한다.

무후사나 무후묘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관승, 왕평, 장포가 오장원에도 있다. 오장원 시절에는 이미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영웅호걸들은 다 떠나고 젊은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현세 사람들은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한 이유가 유명한 장수들이 모두 세상을 등진 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당에는 제갈량이 죽을 때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유성이 운석이 되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제갈량 사당 중 유일하게 이곳에는 아내 황부인의 조각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기전에 황부인은 여러 번 그를 보러 이곳에 왔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황부인이 제갈량 못지 않게 지혜로웠다고 믿는다. 목우류마도 제갈량이 아내와 같이 생각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제갈량은 현재의 오장원에서 3km 떨어진 호록성이란 곳에 살았는데, 그가 죽은 후 후손들이 주변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오장원 주변 곳곳에는 죽어서라도 제갈량과 함께 하고 싶은 후손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에는 다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늙은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지키며 순양을 키우며 살아간다. 제갈량이 살아 오장원의 한 촌로가 됐다면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장원을 둘러본 취재진은 드디어 산시성 동부에 있는 통관(潼關)으로 향했다. 화산의 동북 기슭에 있는 이곳은 황하의 급굴곡점이라고 한다. 산서, 하남, 섬서 3성의 교통요지로, 서북 관계 수출입 화물을 옮겨 싣는 중계지기도 하다.

옛 통관은 통관현 강커우 동남쪽 황허 강변에 위치한다. 병가필쟁의 요충지인 통관은 그 형세가 험준하고, 남쪽에는 태령, 북쪽으로는 위나라와 접하고 있다. 주위는 산과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양장(양의 내장)’과 같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후한 말년, 조조와 마초가 통관에서 대 전쟁을 펼쳐 유명해졌다. 조조는 관서 지방의 혼란을 막고자 건안 원년 통관 관성을 건립했다. 이곳은 마초자회, 12련성(12개의 이어진 성), 양사오문화 유적 등으로 유명하다.

통관 입구에는 재밌는 유적지가 있다. 바로 마초자회란 곳으로, 한그루의 회나무가 서 있다. 조조가 마초에게 쫒겨 도망가던 중 마초가 던진 창이 조조를 비껴가 회나무에 꽂혔다고 한다. 창이 나무에 얼마나 깊이 찔렸던지 창을 뽑는 사이 조조는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그 나무는 1955년에 벼락을 맞아 사라졌고, 일부 남은 부분은 박물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50년 정도 된 회나무가 다시 자라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일행은 마초자회를 잠시 둘러본 뒤 통관 언덕 위로 올라갔다. 통관은 황하강 99개 굽이치는 물줄기 가운데 가장 센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서북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통관을 얻는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할정도로 천연적인 요새였다. 일제 침략당시 유일하게 못 들어온 곳이 산시성인데, 통관을 잘 지켰기 때문이란다.

12개의 봉우리로 돼 있다는 12련성은 보존이 잘 안돼 훼손된 곳이 많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훗날 금광산업이 발달해 금을 캐기 위해 문화적 가치가 뒤로 밀렸던 것이다.

다행히 중국 정부는 이곳에 현재 산시성의 역사와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을 건립, 통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취재진 일행을 맞으러 나온 가오멍야(高萌雅·여) 통관현 부국장은 박물관 건립에 대단한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중국 정부가 이제는 문화관광 발전에 관심이 많다”며 “통관의 고성(古城)을 복원하고 문화관광 상품을 만들어 중국의 근간이 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전 세계에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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