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는 중국의 혁명원로인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의 아들로 태자당이다. 그의 정치적 명성은 다롄(大連)시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는 1988년부터 2000년까지 13년간 다롄에서 일했으며 마지막 직책은 다롄시 서기였다. 그는 다롄에 무수한 외자를 끌어들여 선진 공업도시로 변모시키는 한편 환경개선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다롄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 하나로 만들었다. 공무원들에게 엄하게 대해 관료사회에서는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인민들은 그의 열정에 환호했다. 다롄 시민들은 그에게 축구, 의복과 함께 '다롄삼보(三寶, 다롄의 세가지 보배)'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줬다.
다롄에서의 실적을 토대로 그는 2000년 랴오닝(遙寧)성 성장으로 취임했다. 매사 자신감에 넘쳤고 직선적인 성격의 보시라이는 당시 랴오닝성 서기와 잦은 마찰을 빚는다. 그리고 그는 2004년 국무원 상무부장으로 베이징에 돌아온다. 상무부장으로 세계 전역을 누비며 중국의 무역정책을 옹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다 훤칠한 키에 호남형 외모로 보시라이가 나타나면 외신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서방세계 언론들은 상무부장 보시라이에 대해 "보시라이는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고 정력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해 중국의 폐쇄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평을 내놓았다.
2006년부터 보시라이는 차기 총리 후보로 거명되기 시작한다. 차세대 지도부는 '리커창 총서기 - 보시라이 총리' 를 중심으로 꾸려질 것이라는 예측기사도 심심챦게 나왔다. 하지만 그의 직선적이면서 주관이 뚜렷한 성격은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에 맞지 않는다는 평이 나오면서 총리의 꿈은 좌절을 맞게 된다. 2007년 17대 전국대표대회는 그를 정치국위원에 올리기는 했지만 충칭시 서기라는 다소 '초라한' 직책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가 조폭과의 전쟁을 위해 특별히 영입했던 왕리쥔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왕리쥔이 미국으로 망명을 기도한 사건이 벌어졌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이 확대되자 결국 그는 충칭시 서기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그의 상무위원 진입이라는 일생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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