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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2> 거시경제의 조타수,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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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10-1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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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인 선전이 2010년 경제특구 설립 3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다.


공산당 테크노크랫 중국을 G2의 반열에 올리다.

아주경제 베이징 특파원 조용성 기자 =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에 모인 성난 100만 군중은 다당제 도입과 서구식 민주주의 도입을 외쳤다. 집권중인 중국공산당에게 정권을 내놓고 물러서라는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당시 자오쯔양(趙紫陽) 공산당 총서기는 시위대와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자오쯔양을 실각시키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톈안먼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킨다. 시민과 군인들을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공산당의 정당성에 타격을 줬다. 또한 덩샤오핑 정치인생에도 큰 오점으로 남는다. 톈안먼시위는 아직도 중국공산당으로서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이다.

톈안먼시위의 발단은 물가불안과 대량의 실업사태 등 경제운용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무엇보다 단기 폭발적인 고성장에 따른 인플레가 문제였다. 당시 중국은 덩샤오핑이 1978년 11기3중전회에서 제창한 개혁개방노선을 따라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많은 유동성이 풀려나가자 물가가 급등했다. 1988년과 1989년 두해동안의 물가상승률은 무려 각각 18.5%, 17.8%였다. 이에 중국은 이중가격제를 도입해 계획된 한도내의 재화에 대해서는 낮은 가격을 책정했고, 계획을 초과해 생산된 재화에 대해서는 시장가격을 적용시켰다.

계획가격과 시장가격은 두세배 차이가 났다. 자연스레 이를 이용해 부를 챙기는 부패세력이 생겨났다. 관료들과 일부 약삭빠른 기업인들은 계획된 가격에 재화를 구매해 시장가격으로 팔아넘기며 막대한 부를 손에 쥐었다. 사회 곳곳에 벼락부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물가는 더 치솟았다. 마침 당시 사회에는 국유기업 개혁으로 인해 실업자가 양산돼 있었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여러시간을 줄을 서야하고 치솟는 식품가격에 밀가루 한봉지 사기 힘든 인민들은 벼락부자가 된 관료들의 모습에 분노했다. 불만에 가득찬 젊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하나둘 학교와 거리에 모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게 톈안먼사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정권유지차원에서 그리고 집권 정당성유지를 위해 경제운용에 각별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경제운용이 곧 사회안정으로 이어지며 사회안정이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도로 직결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은 뚜렷한 경제운용 목표를 지니고 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을 명확한 국가의 목표로 제시했으며 이같은 방침을 신중국 성립 100년이 되는 2049년까지 유지할 것을 못박았다. 이 방침이 나온 이후 중국은 초고속 압축성장을 지속한다. 때문에 중국의 경제건설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주창한 1978년부터 비로소 시작된다고 평가받고 있다.

1978년이후 외자유치를 통해 저임금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경제건설이 지속됐지만 톈안먼사건으로 인해 개혁개방은 주춤하게 된다. 사회각층에 개혁개방으로 인한 피로감이 발생했고 속도조절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좌파분위기가 만연하면서 시장경제를 버리고 과거 사회주의로 회귀하자는 목소리마저 일렁였다. 그러자 1992년 1월 덩샤오핑은 남방시찰에 나선다. 선전(深圳)경제특구와 광둥(廣東)성 일대를 돌아보며 개혁개방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덩샤오핑은 당시 광둥지역 일대에서 중국경제에 대한 많은 어록을 남긴다. 이 어록을 남순강화(南巡講話)라고 한다.

남순강화는 더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경제개발과 성장에 다시 드라이브를 걸라는 지상 명령이 었다. 덩샤오핑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만큼 중국사회는 다시 분위기일신을 통해 더욱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덩샤오핑은 1993년 경제운용능력이 뛰어난 주룽지(朱鎔基)를 국무원 상무부총리에 발탁했다. 주룽지는 1998년 총리에 올라섰고 2003년 퇴직했다. 그가 부총리, 총리로 일한 10년동안 중국은 거의 매년 10%이상의 기록적인 성장률을 달성했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때도 중국은 7%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했다.

그리고 주룽지는 WTO가입협상을 주도해 2001년 중국을 WTO 회원국으로 만들었다. 중국으로서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지만 주룽지는 강한 카리스마와 신념으로 밀어붙였다. 개혁개방이후에도 많은 부분의 시장에서 빗장을 걸어잠그고 있었던 중국이었지만 WTO가입을 위해서는 시장을 개방해야 했다.

WTO가입은 중국에 있어 제2의 도약을 위한 또다른 도전이었다. 그것은 걸음마 단계인 중국의 시장경제를 200년 자본주의 세계에 정식으로 오픈하는 것이었다. 자본시장은 물론 상품시장 농산물시장 등에 대한 개방플랜이 설계됐고, 이 과정을 지켜본 서구자본은 중국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유럽자본이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WTO가입으로 인해 다시한번 외자가 밀물처럼 들어왔고 이는 또다른 성장동력으로 작용해 주룽지 퇴임이후 10년간의 경제번영을 이끌게 된다.

2002년 장쩌민(江澤民)은 당총서기직에 물러나면서 그가 주창한 3개대표사상을 공산당 당장에 지도이념으로 삽입시켰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선진문화, 생산력, 인민이익 등 세가지를 대표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주목할 것은 생산력에 있다. 공산당이 생산력을 대표한다면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이 가능해진다. 노동자와 농민을 기본으로 설립된 공산당이 자본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이로써 공산당 지배체제 하에서도 자본가들이 안심하고 사업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자본가들은 입당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공산당으로서는 외연이 확대되며 사회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2003년에는 주룽지에 이어 원자바오(溫家寶)가 총리가 등극해 중국경제를 고속성장으로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에 올라선 후진타오(胡錦濤)는 과학발전관과 화해사회론을 주창하며 서부대개발과 서민경제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원 총리는 특히 지난해부터 중국경제의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무려 4조위안의 돈을 풀어 전세계 경제침체를 막아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GDP규모면에서 세계 2위에 올라서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국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위안화 국제화도 탄력을 받고 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중앙재경영도소조를 통해 당의 방침을 국무원이나 기타 경제관련 부서에 투사시킨다. 현재 영도소조의 조장은 원총리이며 부조장은 차기 총리로 확실시되는 리커창(李克强) 현 상무부총리다. 영도소조는 환율정책이나 금리정책, 부양정책 등 광범위한 중국경제를 다루며 비공식적이면서도 수시로 개최된다. 활동내용은 대외에 공개되지 않는다. 영도소조를 거친 보고서와 제안서들은 상무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후 국무원 등 집행기관으로 하달돼 정책으로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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