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한선교 위원(새누리당)은 27일 동북아역사재단으로 받은 일본의 역사교과서와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한국의 역사교과서를 토대로 3.1운동 및 유관순 열사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본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일본 고등학교 근현대사 역사교과서 7종 가운데 4종에 유관순 열사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8종 중 본문에 유관순 관련 내용이 수록된 교과서는 단 1종(지학사)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8종 중 항일독립운동 중 사용됐던 태극기를 언급한 교과서는 단 3종(교학사, 금성출판사, 비상교육)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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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의 3.1 운동 설명부분에서는 ‘평화적으로 전개되던 초기의 만세 시위는 일제에 무력탄압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제의 식민지 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등 점차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 의원실은 일제가 총칼로 3.1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항거로 시위가 과격해진 부분에 대해 폭력적이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천재교육에서는 3.1운동에 대한 설명부분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는 격화되었고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들도 많았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하여 무력 저항의 모습을 띄기도 하였으나, 비폭력 원칙에 따라 진행된 시위는 세계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3.1운동에 대한 축소·왜곡도 드러났다.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인 자유사에서는 3.1 운동을 ‘일본 통치하의 조선에서는 1919년 3월 1일, 옛 국왕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데모행진을 했다. 이 움직임은 순식간에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으나, 이후에는 통치 방침을 문치정책으로 변경하고 후에 일본과의 일체화를 추진해 나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비폭력 집회로 계획되었지만, 점차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했다. 군대가 충돌해서 양자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라고 매우 간략하게 기술해 실상과 의미를 축소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경찰과 군대의 강제진압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이 살해되거나 잔학한 고문이 이뤄졌다는 내용은 빠져있고, 양자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기술해 우리 민족과 비슷하게 일본측도 많은 희생이 있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동경서적에는 3.1운동에 대해 ‘3.1독립운동에는 학생과 기생(게이샤) 등 여성들도 있었다. 도쿄에서 친목회를 조직하고 있던 조선 유학생들은 귀국해서 운동에 동참했다. 사진은 서울의 중심가를 행진하는 여학생’이라고 표현하며 3.1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동경서적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경우도 3.1운동을 소개하는 지면에서 일본의 민예관소장이었던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서술이 3.1운동을 설명하는 부분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활동을 통해 일본의 잔학성을 의도적으로 얼버무리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요즘 학생들이 3.1운동을‘삼쩜일운동’‘3일만 하는 운동’이라 말하고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도 낯설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은 가운데 한 언론사(CBS노컷뉴스, 2013) 설문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중 절반은‘3.1운동을 모른다’고 답했고 초등학생 25%는 유관순열사를‘모른다’고 하는 등의 무관심도 나타나고 있다.
한선교 의원은 “역사란 과거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야 하고, 그러한 면에서 그것이 정치적인 의도로 만들어 지거나 정치적인 계파에 의해서 좌우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우리 학생들이 여러 문화에 대한 상대성과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수 있도록 근현대사 역사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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